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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48) ‘로빈슨 크루소’ - 근대적 인간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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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6-25 15:12:18 수정 : 2020-06-25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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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는 1719년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을 발표했다. 훗날 ‘로빈슨 크루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동화로 각색된 크루소 이야기를 한번쯤 읽었을 것이다. 소설은 무인도 표류기 차원을 넘어선다. 많은 학자들이 크루소에게서 근대적 인간이나 자본주의 정신의 원형을 본다.

 

배가 난파한 뒤 무인도에 홀로 살아남은 크루소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나쁜 점’과 ‘좋은 점’으로 나누어 “마치 차변과 대변에 기재하듯” 적는다. 대차대조표에 자산을 부채와 자본으로 나누어 기재해 비교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처럼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걸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서 대차대조표의 대변에도 뭔가 써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 섬 생활을 받아들인다. 나무에 칼로 흡집을 내어 날짜를 세기 시작한다. 치밀한 계획을 세워 집을 지은 뒤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옷이나 각종 기구를 손수 만든다. 이런 창조적 노동을 통해 자아 의식을 얻게 된다. 

 

“나는 그 땅의 왕이며 주인이었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소유권이 있었다. 만일 어디론가 옮겨갈 수만 있다면 영국에 영지를 가진 다른 영주들처럼 온전히 후대에 물려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섬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많은 깨우침을 얻는다. “한마디로 말해 온갖 사물의 성질을 겪어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소용이 있는 만큼만 좋은 것이었다. 무엇이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쌓아둔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쓰는 만큼만 좋은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간혹 식인종이 섬에 포로를 데리고 와서 잔치를 벌이곤 했는데, 크루소는 거기서 탈출한 야만인 한 명을 구해준다.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기독교인으로 만든다. “섬에는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우리를 깨우쳐줄 성령이 함께했다. 영국과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세월이 흐른 뒤 섬 인근에서 벌어진 영국 배의 선상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한 크루소는 프라이데이와 함께 이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다. 섬에 표류한 지 28년 만이다. 그동안 브라질에 남겨둔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엄청난 부를 거머쥔다.

 

이 소설은 출판시장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근대소설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크루소는 근대인의 개인주의와 자립 능력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크루소를 “전도 활동도 겸하는 고립된 경제인”이라고 했다. 크루소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의 근원이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윤리에서 나왔다는 베버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인 것이다.

 

미국 문학평론가 존 리체티는 이 소설에 대해 “로빈슨이 홀로 살아가며 도덕적,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종교적인 믿음과 물질적인 자급자족을 통해 위안과 안정을 찾고 섬의 지배자가 되는 동시에 스스로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 발전과 성숙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로빈슨 크루소는 활력과 재치 넘치는 창의력으로 가득 차, 모험을 즐기는 현대적 자본가의 전형을 보여 주기도 한다”면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승리를 거둔 주인공이 몸으로 체득한 서구의 개인주의와 제국주의의 심리학적 근원과 도덕적 문제를 극화한 작품”이라고도 했다. 

 

이 책을 필독서로 꼽는 이들이 많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자연 교육에 관한 가장 적절한 논문”이라며 “에밀이 읽어야 할 최초의 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고 사물들의 진실한 관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선 우리를 ‘고립된 인간’의 처지에 놓고, 고립된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의 유용성’에 관련지어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인의 첫 출발점을 제시한 셈이다.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은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정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서 자기 재량과 자기 책임만으로 개인이 처한 상황을 극복해 보인 인물”이라고 했다. “남쪽 바다의 외딴 섬에서 마치 경영자처럼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코디네이트하여 필요한 물건과 도구를 만들어내며 섬에서의 생활 방식과 시간 활용 방법을 결정”하고 “자신의 손발을 노동자처럼 사용하며 어떻게 살지 궁리하고 일을” 하는 데서 “자본주의 정신의 원형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국권을 일제에 빼앗기기 직전인 1909년 이 소설을 ‘로빈슨 무인절도 표류기’란 이름으로 번역해 잡지 ‘소년’에 연재했다. 당시 조선의 청소년들에게 서양 근대의 정신을 전해주면서 모험심과 진취적 기상을 고무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코로나19 사태로 남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지금이 ‘로빈슨 크루소’를 읽기에 적절한 때다. 고립된 개인이 역경을 뚫고 자립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근대적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편견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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