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집단 발병한 미국 크루즈선 ‘그랜드 프린세스’호가 ‘떠다니는 세균배양 접시’라는 오명을 얻은 일본의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숨기는 데 급급해 제대로 대비를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일본 사례와 판박이라는 지적이다.
그랜드 프린세스호에서 71세 남성 1명이 사망하고, 최소한 21명의 감염자가 나옴에 따라 이 크루즈선은 미 캘리포니아로 긴급 회항해 9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오클랜드항으로 입항했다.
앞서 일본 요코하마항에 고립된 채 정박 중이던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는 696명의 감염자가 나오고, 7명이 사망했다. 감염병의 역내 유입을 막겠다며 승객과 승무원을 크루즈선에 고립시켜놓고 느슨한 방역과 늑장 검사로 확진자가 급증하는 사태를 자초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8일 그랜드 프린세스호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했다. 승무원들이 같은 장갑을 낀 채 수십명에게 음식을 배달하면서 승객들과 대면 접촉을 하고 있고, 적절한 보호장비 없이 침대보 등을 정리하거나 더러운 접시를 수거하고 있어 선실에서 감염자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랜드 프린세스호에는 승객 2422명과 승무원 1113명 등 3535명이 타고 있다. 이 중 증상이 있는 46명만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승객 2명과 승무원 19명 등 21명의 감염자가 나왔다. 벤 카슨 미 보건복지부(HHS) 장관은 이날 ABC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디스 위크’에서 그랜드 프린세스호가 오클랜드항에 도착한 뒤 승객과 승무원을 어떻게 관리할지 세부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
미 보건복지부는 일단 승객들을 4개 연방 군사시설로 옮겨 코로나19 검사를 하고, 14일간 격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1113명의 승무원은 크루즈선에 남아 격리 생활을 한다. 64개국 수백 명에 달하는 외국인 승객 이송 문제는 각국 정부와 협의 중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그랜드 프린세스호에 탑승했다가 감염된 승무원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항할 예정이었던 ‘로열 프린세스’호에 탑승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 선박에 항해 금지 명령을 내렸다.
NYT는 또 CDC가 지난달 말 코로나19 확산의 위험성을 대중에게 경고하려 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호통 때문에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도 13명의 전·현직 당국자를 취재, 코로나19 대응에 있어 트럼프 행정부의 잘못된 접근이 위기를 부채질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랜드 프린세스호의 입항 여부를 두고서도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보건 당국자들이 대피 계획을 보고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크루즈선에 계속 태워둬 미국 내 감염 규모를 늘리지 않는 방안을 선호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