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대선의 향방을 미리 점쳐볼 수 있는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 개최 하루 전인 2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느긋하게 슈퍼볼을 즐기라는 트윗을 날렸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2020년 11월 대선은 ‘4년 임기’를 한번 더 연장하기 위한 행사다. 상원의 탄핵심판 표결이 남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후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이에 비해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발걸음은 절박했다. ‘품위없고 악랄하며, 잔인하고 막말을 일삼는’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을 되찾기 위해 아이오와 곳곳을 누볐다. 이번 코커스를 통해 ‘새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사활을 건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유세장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지지자들의 고민을 전한다.

◆어딜가나 경제 걱정...“고용률 높다지만 직업 2∼3개여야 먹고 산다”
이날 아이오와주 주도 디모인에서 차로 30분거리인 인디애놀라의 심슨 칼리지 켄트캠퍼스센터 앞에는 엘리자베스 워런(71) 상원의원을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7년차 교사라고 소개한 20대 퀴닌 티핑은 워런을 지지하는 이유를 묻자 대뜸 육아·보육 정책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미국 경제가 지표상 훌륭하지만 ‘하나의 직업’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다면서 특히 맞벌이 직장인들의 보육 문제가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이번에는 여성이 대통령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4년 전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지만 그때는 클린턴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보육문제에 집중하는 이유를 묻자 티핑은 아내를 가리키며 “아내도 교사이고, 올해 아이가 태어난다”고 웃으며 말했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로 후보의 정책을 점검하기 위해 유세장을 찾았다는 설명이다.
타운홀 미팅 형식이던 이날 행사에 앞서 워런 캠프는 켄트캠퍼스 센터의 홀에서 지지자들과 기자들을 먼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홀 한 켠 의자에 나란히 자리를 차지한 베시 커틀러(77·여) 부부는 멀리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커틀러 부부는 현재 워런이 아닌 조 바이든(78) 전 부통령을 지지하지만 다른 후보들 유세 현장을 투어하는 중이다. 그는 “막말을 일삼고 잔인한 트럼프를 싫어한다”며 “북한과 협상을 하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커틀러 역시 미국 경제가 수치적으로 나을지 모르지만 하나의 직업으로 버티기 힘든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워런 상원의원이 연단에 설 때 캠프 관계자들이 주위의 지지자들에게 나눠준 손팻말에는 ‘학생들의 빚을 탕감하라’(Cancel Student Debt)고 적혀있었다.
워런 의원은 여러 정책에 있어 버니 샌더스(79) 상원의원과 겹친다. 버니가 급진적이라면 워런은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한다는 평이 많았다.

◆모든 유세장에서 만난 ‘부동층’...“○○을 지지하지만, 아직 확신이 없어요”
워런 유세장에 정치 교육을 위해 어린 남매를 데리고 왔다는 한 여성은 “이번 코커스에 표를 행사해야 한다”면서 인적사항과 지지후보 등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부터 여러 후보들의 유세장을 돌고 있다”면서 “현재 마음에 둔 후보는 있지만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아이들과 더 많이 다닐 생각”이라고 했다. 이 여성을 따라나선 남매는 한국 기자라는 말에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마도 ‘K팝’ 아이돌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아이오와 코커스를 취재하며 만난 미국인들 중에는 이처럼 지지 후보를 확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지지 후보 선택의 최우선 고려사항’을 묻는 질문에는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높은 후보”라는 답이 많이 나왔다. 티핑 부부나 커틀러 부부도 각각 워런과 바이든이 트럼프 대통령을 이길 것으로 믿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지한다고 언급했다.

연임이 가능한 미 대통령제 특성상, 올해 같은 재선에서는 현 대통령에 대한 대항마를 찾게 될수밖에 없다. 특히 민주당 후보들의 유세장에서 만난 미국민들은 ‘미국을 두동강냈다’는 평가를 받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순수하게 코커스를 즐기기 위해 여러 유세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미국인도 많았다. 모든 유세장에서 ‘후보 추적기’ 사이트를 열어서 다른 후보의 다음 유세장이 어딘지 검색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 후보에 매몰되기보다 여러 선택지를 고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젊은’ 버니, ‘힘없는’ 바이든, ‘세심한’ 워런, ‘열정넘치는’ 부티지지...
아이오와 유세장에서 만난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색깔이 달랐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 다툼을 벌여온 샌더스 의원과 바이든 전 부통령은 ‘50대’를 기준으로 갈린다. 젊은층 빚 탕감 등 급진적 정책을 내세운 샌더스 의원은 50대 미만의 지지가 두텁다. 민주당 내 보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중도표를 잠식하는 바이든 전 부통령은 50대 이상에서 지지도가 높다.
샌더스 캠프는 세계적인 인디 밴드인 뱀파이어 위켄드 공연과 수퍼볼 맥주 관람 등 젊은 층이 반응할만한 이벤트를 유세와 묶어 호응을 끌어냈다. 민주당 대선후보 ‘빅4’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후보가 젊은층 지지층이 가장 두텁다. 진보적인 그의 성향과 함께 젊은 층의 수요를 반영하는 뛰어난 마케팅 감각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세 현장 추적기를 가동해 각 후보의 행사에 등록했는데, 일정 확정여부 메시지 외에 소액기부를 권하는 메일을 보낸 곳은 샌더스 캠프가 유일하다. 4년 전 대선 캠페인을 해 본 경험에서 나온 치밀함일 것으로 짐작한다.
바이든 전 대통령의 유세는 힘이 없었다. 유세 도중 미리 준비한 스크립트를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새 후보를 찾는 시민들을 끌어들이기보다 ‘오래된 친구같은’ 지지자들을 관리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가 마이크를 잡은 시간의 절반가량이 그간 도움을 준 친구와 지인, 특별 지지자들에 대한 소개와 감사 인사로 채워졌다. 그나마 누이와 손녀, 아내, 공개적으로 지지의사를 밝힌 주지사와 의원들의 지지 유세가 있었기에 대선 유세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바이든 전 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상승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인듯 싶다.

워런 의원은 다른 어떤 후보들보다 세심한 편이다. 유세장에 등장하는 손팻말에 구체적인 정책 구호를 넣은 것은 물론, 유세 현장 근처에서 만난 지지자들도 워런 의원에게 바라는 바가 명확해 보였다. 워런 의원은 이날 유세현장에서도 즉석으로 질문을 받았고, 행사가 마무리되자 근처에 있는 어린 아이들을 따로 불러 챙기는 세심함을 보였다.

민주당 대선주자 ‘빅4’ 가운데 유일한 30대인 피트 부티지지(38) 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의 연설은 ‘70대 트리오’(샌더스·바이든·워런)에 비해 열정적이다. 다만 샌더스 의원이나 바이든 전 부통령 나이의 절반에도 못미쳐서인지 정치 연륜이 적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부패하고 혼란에 빠진 미국을 바꾸기 위해 새 대통령을 맞아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정책 언급은 드물었다. 흑인들의 지지가 바닥인 그로서는 흑인 비율인 높은 지역이 몰린 중반 유세의 성패가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디모인·시더래피즈·인디애놀라=정재영 특파원 sisley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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