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태는 계획적이었나, 아니면 우발적이었나. 사태의 주범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권력에 눈먼 배신자, 반역자인가, 아니면 민주화를 앞당긴 혁명가인가. 40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진실을 둘러싼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22일 개봉하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어떤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때 그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고 사건 발생 전 40일간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풀어낸다. 배우들의 연기 대결은 그들의 충성 경쟁 못지않게 치열해 보는 재미를 배가한다. 배우 이병헌(50)이 그 중심에 있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정치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감정과 심리를 파고드는 영화”라며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치적 해석을 차단하려는 듯 영화 속에 실존 인물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통(이성민), 차지철 경호실장은 곽상천(이희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용각(곽도원)으로 분한다. 이병헌이 김재규 중정부장을 모델로 한 김규평 역을 맡았다.
느와르 장르만의 진한 감정이란 매력에 이끌려 작품을 선택했지만 연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실존 인물, 실제 사건이란 부담감과 제약이 크게 작용했다. 치밀한 준비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는 정공법을 택했다.

“실존 인물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해야 하는 말과 행동이 이미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좀 많이 힘들었어요. 어떤 틀에 갇혀 연기해야 했고, 애드리브는 생각도 못 했죠. 감정의 크기도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책이나 자료들을 볼 수 있는 만큼 다 보고, 그 인물과 가까웠던 분의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런 것들이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백두산’ 리준평과의 이질감을 우려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관객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어느덧 머릿속에 리준평은 사라지고 김규평만 남는다. 그의 말처럼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일어나는 마법 같은 일”인지 모른다.
“극단적 클로즈업은 대사 없이 감정을 표현해 내야 하는데, 스크린에서 그 감정을 훨씬 세밀하게 느낄 수 있어요. 얼굴이 집채만 하게 나오니까 분위기만 풍기고 있어도 그 감정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거든요. 그 인물이 그 상황 속에서 가져야 하는 감정을 충만하게 가지고만 있다면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충분히 나타날 거란 믿음으로 연기하죠.”

그는 또 “미묘하거나 절제된 감정이 많아 배우들의 힘이 중요한 영화”라면서 “배우들의 시너지가 잘 살아났다”고 평했다.
“이희준 배우는 몸무게를 25㎏ 늘리고 걸음걸이며 목소리 톤도 달라지는 걸 보면서 ‘몸무게만 늘린 게 아니구나, 많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배우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성민 배우는 리허설을 하는데 첫마디에 연기 에너지가 좋은 사람과 연기할 때 느껴지는 흥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잘하시는구나, 좋은 배우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촬영 현장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항상 있었습니다.”

박통의 오른팔을 노리는 곽상천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김규평과 달리, 지난 27년여간 오직 연기로 독보적 입지를 구축한 그에게 대적할 이인자는 없어 보인다. 그는 의외로 겸손했다.
“전 작품을 할 때마다 똑같은 각오, 똑같은 정도의 몰입과 노력을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감정은 뭔지를 정확히 잡아내려 항상 애써 왔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몰입하다 보면 그래도 실망스럽지 않은 캐릭터는 나오는 것 같아요.”
그는 대중의 기대치에 대해서는 “다음번엔 뭔가를 제대로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저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할 것 같다”면서 “사랑받는 영화가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영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새 작품을 들고나올 때마다 이전 출연작을 잊게 하는 그의 연기는 자신을 틀에 가두지 않는 그만의 자유분방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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