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따라 떠나는 남도여행/보성여관·벌교천·소화의 집···소설속 풍경 아른/보성 벌교읍 ‘태백산맥 문학거리’ 조성/개화기때 건물로 꾸며…그 시절로 점프/걸쭉한 사투리 주인공들 어디선가 튀어나올 듯/술도가 있던 곳 큰 술항하리 그대로/사랑의 은신처 ‘현부자집’ 눈길

주머니 사정이 늘 넉넉지 못했던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용돈이 모이면 달려가던 곳이 있었다. 학교 앞 헌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다가오는 먼지와 곰팡내가 그때는 얼마나 좋던지. 나만의 보물이 가득한 비밀의 공간 속으로 숨어드는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한권 두권 사 모으던 책이 소설 ‘태백산맥’이다. 누렇게 바래고 여러 주인이 여기저기 끄적거려 놓은 낙서까지. 비록 헌책이지만 조정래 작가의 빼어난 언어가 벌교 꼬막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는 문장 하나하나는 국문학을 전공하며 작가를 꿈꾸던 시절 ‘교과서’이자 보물1호였다. 직장을 얻고 여유가 좀 생기자 가장 먼저 전집을 구입해 책장에 모셨다. 지금도 가끔 서재 한곳을 차지한 책을 보면 대학 시절 추억이 떠오르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다.

#태백산맥의 추억을 소환하는 보성여관
광복 이후 한국전쟁까지 격동의 시기에 벌어진 여순사건과 이데올로기 갈등을 다룬 대하소설 태백산맥. 무대는 ‘주먹’과 ‘꼬막’의 본고장 전남 보성군 벌교읍이다. 소설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도로 이름까지 태백산맥길로 지어졌고 태백산맥 문학거리도 조성됐다. 입구에서 만난 해설사는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말고, 순천에서 얼굴 자랑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고 했는데 다 옛말”이라며 손을 내젓는다. 아주 오래전 벌교 포구와 낙안 곡창지대 덕분에 돈이 넘쳐나자 주먹패들이 몰리면서 생겨난 말이란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초겨울의 벌교는 ‘살벌한 주먹’의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포근하기만 하다.



문학거리로 들어서니 마치 주인공 정하섭과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벌교 주먹계를 평정한 염상구가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 같다. 2011년 조성됐는데 피아노 학원도, 문방구도 개화기 때 건물로 다시 꾸며 타임머신을 타고 소설 속 시대로 점프하게 만든다. 작가는 4살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벌교에서 살았고 집필을 위해 수십 차례 이곳을 찾았단다. 그의 소설에 벌교 곳곳의 옛모습이 잘 녹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리 입구에는 삼화목공소가 세월을 그대로 이고 있다. 이 거리의 터줏대감이자 목수인 왕봉민(71)씨가 한참 대패질중이다. “저기 천정에 상량문 보이죠. 1941년에 지어졌으니 보성여관보다 6살 동생입니다. 1955년 선친이 운영하던 목공소를 물려받았는데 한번도 문을 닫지않고 운영하고 있답니다”. 중국산에 밀려 돈벌이는 안되지만 지금도 도마, 문짝, 침대 장식장 등을 만들어 판다고 한다.

많은 여행자는 가장 먼저 보성여관으로 향한다. 소설에는 남도여관으로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이던 1935년에 지어졌다. 판자벽에 함석지붕을 올린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벌교는 여자만을 끼고 고흥, 순천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 이에 일제는 벌교읍에 터를 잡고 수탈을 위한 식민지 포구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성여관 거리는 일본인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본정통’으로 불렸다. 보성여관은 대대적인 보수와 복원작업을 거쳐 2012년 숙박업소로 다시 문을 열었다. 소설에서는 현부자가 소유한 벌교 유일 여관으로 빨치산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숙소로 쓰인다. “임만수, 똑똑히 들어!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라는 대목이 등장할 정도니 예전에는 지금의 특급호텔 수준이었으리라.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담한 카페에 흑백TV, 재봉틀 등 다양한 소품이 더해져 운치를 배가한다. 오른쪽 공간은 벌교의 세월이 정리된 작은 역사관이다. 안마당 정원수를 둘러싼 객실 디딤돌에는 손님을 위한 고무신이 가지런하게 놓였다. 고향마을 부모님 집에 온 듯 아늑하니 휴대전화와 TV를 멀리하고 며칠 머물려 사색하기 좋겠다. 툇마루 천장 삼베로 치장한 등불에 글이 하나 매달렸다. ‘어느덧 내 가슴에 피는 그리움’. 세월이 덧없이 흐르니 늘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을 잘 표현했다. 2층은 다다미방으로 꾸며졌다. 판소리 공연, 실내악, 인문학 강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연중 진행되니 미리 일정을 확인하고 보성여관을 찾으면 두 배로 즐길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을 따라가다
보성여관 맞은편 ‘정도가 꼬마 정식백반’은 주인공 정하섭의 본가로 나오는 술도가. 실제 일제강점기부터 벌교 일원에 막걸리를 공급했다고 한다. 30여년 전 영업은 중단했지만 옥상에는 당시 술독으로 쓰던 큰 항아리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금이 간 항아리를 철침으로 꿰매 쓴 흔적들이 세월을 말해준다. 벌교역을 지나 태백산맥문학관으로 향한다. 벌교천을 건너다 보면 ‘철다리’를 만난다. 물건을 훔치다 들켜 일본 선원을 죽이고 도망쳤다 해방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뒤 독립투사 행세를 하는 염상구. 그가 깡패 왕초와 벌교 주먹 패권을 다투면서 기차가 지날 때 철길 위에서 담력싸움을 하던 곳이다. 소설 속 장면이 영화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태백산맥문학관 오른쪽에는 무당 소화의 집이 보인다. 실제 무당집으로 낮은 토담과 풍성한 대나무숲이 집을 포근하게 감싸고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는 정갈하고 아담한 집이었단다. 1988년 태풍에 쓰러진 뒤 폐허로 방치됐다 2008년 소화의 집으로 다시 태어났다. 맞은편 현부자네 집은 기본 틀은 한옥이지만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구조다. 소설에는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로 묘사된다.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은 대문 위에 창문이 달린 방이 설치된 독특한 구조다. 안으로 들어서면 웅장한 목조건물이 위세 당당하던 집안임을 알려준다. 조직의 밀명을 받은 하섭이 은신처로 사용하며 소화와 애틋한 사랑을 나눈 보금자리다. 문학관에는 1983년 작가가 직접 그린 벌교 지도와 집필 노트, 불어판 태백산맥, 독자들의 필사본 등이 전시돼 있다.

#윤동주의 서시를 숨긴 정병욱 가옥
벌교 인근 광양에 아주 의미있는 여행지가 있다. ‘정병욱 가옥’이다.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시인 윤동주는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쓸쓸하게 죽음과 마주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 등 31편이 담긴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48년 발간됐다.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을까. 윤동주의 글벗인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 덕분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세상은 윤동주라는 이름과 서시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마치 눈떠 보니 비틀스가 사라진 세상을 담은 영화 ‘예스터데이’처럼.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정병욱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 서울 누상동 등에서 하숙하며 깊은 인연을 맺는다. 윤동주는 시집을 출간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자필로 3부를 만들어 그중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기고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정병욱 역시 시집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징병에 끌려간다. 어머니는 시집을 명주보자기에 싸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룻바닥을 뜯고 그 안에 감췄다. 시집을 보물인 듯 끝까지 잘 숨겼고 다행히 정병욱이 살아 돌아오면서 비로소 윤동주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윤동주는 나머지 1권을 은사에게 주고 또 한권은 자신이 지녔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두권 다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정병욱이 보관한 시집이 유일한 원본이다.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섬진강 망덕포구에는 정병욱 가옥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입구에 걸린 사진 속에서는 윤동주와 정병욱이 함께 정겹게 미소 짓는다. 서로 시를 나누던 문학청년 시절이 윤동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였을 것이다. 시집을 숨겼던 마룻바닥도 그대로이고 시집 초판본 등을 만날 수 있다. 육필원고도 전시됐는데 글씨체를 보니 천생 시인이다.
보성·광양=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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