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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잊히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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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29 22:19:27 수정 : 2019-11-29 22: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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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인류의 진보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이 지적 활동과 경험을 기억하고 지속적으로 축적해온 덕분이다. 자신의 잘못을 기억해야 과오를 고치고 개선할 수 있는 길도 열릴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억을 공동체가 지녀야 할 소중한 가치로 인식했다. 기억을 진실과 같은 반열에 놓고서 망각을 진실의 반대말로 생각했다. 진실을 가리키는 희랍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레테이아(letheia)에 부정을 의미하는 ‘아(a)’가 합쳐진 말이다. 레테이아는 ‘망각의 여신’ 레테를 지칭한다.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닿기 전에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믿었는데, 마지막 강의 이름이 레테였다. 망자는 이 강물을 마시고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지운다고 한다.

온갖 정보가 범람하는 온라인 시대에서 망각은 ‘잊힐 권리’로 대접을 받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잊히지 않을 권리’이다. 트위터가 최근 망각의 강을 건너려다 혼쭐이 났다. “6개월 이상 로그인하지 않은 계정들을 내달 11일부터 삭제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이용자들의 거센 반발을 산 것이다. 계정이 삭제되면 트위터를 사용할 수 없는 망자들의 기록들이 영영 사라지기 때문이다. 4년 전 아버지를 잃은 미국 기업 스케일웍스의 드루 올랜도프 최고경영자(CEO)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트위터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나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결국 트위터 측은 하루 만에 “우리 측 실수였다”며 백기를 들었다.

옛날 그리스 트로포니오스 신전 앞에는 레테와 므네모시네라는 두 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므네모시네는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는 ‘기억의 여신’을 가리킨다. 신전을 방문한 사람들은 먼저 망각의 물로 이전의 번잡한 생각을 지운 뒤 기억의 물을 마시며 신탁의 의미를 가슴에 새겼다.

국민주권은 헌법 1조에 명시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그 신성한 신탁을 수호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국민의 기억이다. 기억 없이 진실은 존재할 수 없다. 각자 므네모시네의 샘물을 마시고 지금 위정자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주권자의 당연한 권리이자 책무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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