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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룩으로 빚은 ‘맑은 술’… ‘청주’ 아닌 ‘약주’라 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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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2-01 13:00:00 수정 : 2019-12-02 10: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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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청주를 제조할 때 사용하는 효모인 ‘입국’을 만들고 있는 모습. 이러한 형태의 누룩을 99% 이상 써야 ‘청주’로 인정받는다. 명욱 칼럼니스트 제공

고전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한다며 맺힌 한을 내비치는 대목이 있다. 분명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라 못한 까닭은 홍길동이 첩의 자식인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전통주에서도 홍길동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술이 있다. 오히려 처지가 더 암울하다. 정실 부인의 아들인 적자가 외부에서 들어온 남의 자식에게 적자의 자리를 빼앗겼기에 원통함이 더 크다. 전통주 기법으로 제조된 ‘맑은 술’이 그 주인공이다.

 

◆주세법상 ‘청주’는 일본식 청주만 해당해...우리누룩으로 맑은 술 만들어도 약주란 명칭만

 

‘맑은 술’은 사전적 의미로 막걸리 등의 ‘탁주’(濁酒·흐린 술)에서 침전물을 걸러 맑은 부분만 따라낸 술이다. 한자로는 ‘청주’(淸酒)로 표기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주 기법으로 빚은 ‘맑은 술’을 ‘청주’라 부르지 못한다. 

 

주세법에서 청주란 ‘누룩의 양을 쌀의 100분이 1 미만으로 해 만든 술’이다. 이로 인해 같은 ‘맑은 술’이지만 우리 전통주는 ‘약주’, 일본 술은 ‘청주’로 불리게 됐다. 

 

한국의 전통 누룩. 떡 모양이라고 해서 떡누룩이라고도 한다. 이 누룩을 1% 이상 쓰면 ‘청주’라는 명칭을 쓰지 못한다. 명욱 칼럼니스트 제공

술을 빚으려면 통상 10% 내외의 누룩이 필요하다. 1% 미만의 누룩으로는 턱도 없다. 이에 청주 양조장에서는 쌀 발효를 위해 누룩을 1% 미만 이용하고 나머지 대부분 ‘입국’(粒麹)을 사용하고 있다. 입국은 일본식 청주를 빚는 데 사용하는 효모로, 흩임누룩이라고도 불린다. 고두밥에 배양분을 뿌린 뒤 일정한 온도와 습도에서 숙성시켜 사용한다. 이 같은 입국을 사용한 술 제조법은 일본식 청주 제조법과 거의 동일하다. 즉, 주세법상 청주는 일본식 청주인 셈이다.

 

반면 쌀 발효 과정 대부분에 걸쳐 전통 누룩을 사용하는 우리 전통주의 경우 주세규정(청주는 누룩 1% 미만 사용)을 도저히 맞출 수 없기에 ‘맑은 술’임에도 ‘약주’(藥酒)란 어정쩡한 명칭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과거에는 청주와 약주는 주세법과 다른 의미로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 청주가 108번, 약주가 52번이나 등장한다. 멀리는 태종 때부터 조선 최후의 왕 순종까지 청주와 약주가 기록돼 있다. 이때 청주는 ‘맑은 술’, 약주는 ‘약성(약효가 있는 한약재 등이 든)이 있는 술’을 의미했다.

 

◆일제가 만든 주세법이 현재까지 영향 줘

 

주세법에서 일본식 청주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맑은 술만 ‘청주’로 인정한 이유는 해당 법이 일본강점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06년 2월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재정 조달의 목적으로 술에 세금을 부과한다. 조세법은 이를 위해 생겨난 법으로 1909년 2월에 제정됐다. 이후 일제는 1916년 7월에 주세령을, 8월에 주세령시행규칙을 공포했다. 1945년에 조선이 독립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지만, 주세법은 일제가 만든 것을 기초로 해서 제정,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주 중 ‘맑은 술’은 ‘청주’에 해당하지만 ‘일본식 청주’만 ‘청주’로 인정한 주세법 때문에 ‘약주’로 분류되고 있다. 사진은 전통주 ‘맑은 술’ 중 하나인 별바랑과 천비향. 각 양조장 제공

조세법 제정 당시 일제는 술을 조선주(朝鮮酒)와 일본주(日本酒)로 나눴다. 조선주에는 탁주와 약주, 일본주에는 청주를 포함했다.

 

문제는 일본주다. 조선에서는 이미 맑은 술, 청주가 빚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일본주만 청주로 인정하고 조선의 청주는 약주로 분류해 버렸다.

 

이는 일본 청주를 고급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세종사이버대 객원교수)는 “탁주와 약주는 주전자나 나무 항아리에 넣어 팔리는 서민적인 술이었으며, 청주는 고급술로 병에 담겼다”라며 “이를 고려하면 일제가 우리 청주를 약주로 억지로 분류했고, 이 같은 분류가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청주는 고급스러운, 약주는 그렇지 않은 술로 굳어졌다”고 지적했다.

 

청주(일본식 청주)는 고급술로, 그중 일본 청주 ‘마사무네’(政宗·정종)는 고급 청주로 인식되면서 ‘정종’이란 단어가 고급 청주를 의미하는 일반명사화됐다. 차례나 제사상에 올리는 좋은 술(맑은 술)을 정종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전통주는 ‘청주’란 이름을 일본에 빼앗긴 채 청주보다 깔끔한 맛이 덜한, 뭔가 현대적이지 못한, 약 성분도 없는데 약술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농산물로 ‘맑은 술’, 주세법에 맞는 청주를 빚었다면 해당 술은 우리 전통주(약주)가 아닌 ‘청주’, 즉 일본술로 분류된다. 현재 질적인 면에서 일본산 청주보다 훨씬 뛰어난 우리나라에서 만든 청주도 있지만 ,법이 ‘청주=일본술’이라고 규정하는 바람에 정상회담 만찬용 술 등 정부 행사 때 공식 술로 선정되지 못하는 뜻밖의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전통 방식으로 빚은 맑은 술은 청주로 불릴 수 없고, 일본식 청주만 청주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어도 ‘청주’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복진 기자 b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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