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말은 이럴 때 통용되는 것인지 모른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영화 ‘벌새’는 1994년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 2학년 은희의 내밀한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 당시 한국 사회, 나아가 우리네 삶을 반추하는 확장성을 갖는다. 지난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넷팩상과 관객상을 시작으로 최근 제36회 예루살렘국제영화제 최우수 장편 데뷔작까지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25관왕을 거머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난 김보라(38) 감독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란 구호를 좋아한다”며 “개인적인 것을 통해 정치적인 것을 아우르는 영화를 만드는 게 제 목표이기도 한 것 같다”고 했다.
‘벌새’는 허구 이야기이지만 불안이란 김 감독의 개인적 감정, 경험이 출발점이 됐다. 영화가 불안해하는 은희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건 이와 맞닿아 있다.
“20대 후반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분갈이하는 것처럼 뿌리가 뽑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외국 생활이 처음이었고 영어도 서툴렀거든요. 그때마다 중학교로 돌아가는 꿈을 꿨는데 ‘왜 이런 꿈을 꾸지’ 하며 어떤 기억과 경험을 기록하기 시작했죠. 시나리오 초고는 2013년에 썼습니다.”
영화는 한문학원 선생인 대학생 영지 등 주변 인물과 은희의 관계 맺기, 만남과 헤어짐을 중심으로 1994년 시대상을 보여 준다. 성수대교 붕괴, 과도한 교육열이 대표적이다.
“은희의 성장 영화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성장 영화라 생각해요.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1994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건 은희가 경험하는 관계의 단절이 다리 단절과 묘하게 연결되기 때문이죠. 강남이란 공간적 배경은 학창 시절 대치동에 살았던 경험에서 비롯됐습니다. 남과 비교하고 1등 하기를 강요하던 분위기가 굉장히 기이하게 기억나요.”
1990년대를 산 사람들이라면 영화 속 디테일에 깜짝깜짝 놀란다. 김 감독이 최소 10차례 수정을 거듭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김근아 미술감독과 연출부가 발품을 판 덕분이다.
“시나리오 구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곳곳에 디테일한 것들을 집요하게 넣었습니다.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사건들, 그 디테일한 것들이 모였을 때 얼마나 폭발적인 힘을 갖는지 보여 주려 했어요. 제작비가 많지 않아 특히 집요할 수밖에 없었죠. 모든 걸 발품을 팔아야 했거든요. 다행히 대치동과 개포동에 영화에 쓸 만한 장소가 많았어요. 재개발하기 전이라 90년대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동네죠. 대치동 미도아파트(한보미도맨션)와 은마아파트, 개포동 주공아파트 일대에서 찍었습니다. 은희네 집은 은마아파트의 빈집을 꾸민 건데 세팅이 됐을 때 예전에 살았던 집 같은 느낌, 기시감이 들었어요. 미술감독님과 제 집 등 여기저기서 소품을 그러모았죠. 은희의 노란 베네통 가방은 그 시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브랜드라 중요한 소품이었는데 온라인 직거래로 구했습니다. 연출부가 90년대 자료도 많이 조사했어요.”
은희 역을 맡은 신예 박지후(16)양은 오디션을 3차례 거친 끝에 낙점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순수하면서도 감정 기복이 심하고 종종 일탈을 감행하는 중2 여학생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은희란 벌새가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의도했습니다. 집이 있어도 집이 없는 듯한 마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은희의 불안한 얼굴로 시작했다가 모든 것이 지나간 뒤 희망적인 미래를 조금은 그려 볼 수 있는 은희의 평온한 얼굴로 끝나는 게 영화의 구조입니다. 첫 오디션에서 제 마음을 울린 건 지후였어요. 시나리오를 자칫 잘못 읽으면 무미건조하거나 너무 감정적일 수 있는데 행간을 읽어 내더라고요. 어린 학생인데 뭔가 찡했죠.”
김 감독은 25년 전 이야기가 지금 유효한 이유에 대해 “우리 사회가 90년대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좀 생긴 것 같다”면서 “과거의 일을 소환하는 건 과거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과거를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질문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은희란 이름은 김 감독의 전작인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2011)의 초등학생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속편에 대한 질문에 “언젠가는 훌쩍 커서 한 30∼40대가 된 은희의 모습을 그릴 순 있을 것 같다. 은희가 어떻게 클지 궁금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연명 의료 중단 인센티브](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17/128/20251217518575.jpg
)
![[세계타워] 같은 천막인데 결과는 달랐다](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17/128/20251217518533.jpg
)
![[세계포럼]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라고?](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09/10/128/20250910520139.jpg
)
![[열린마당] 새해 K바이오 도약을 기대하며](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17/128/20251217518355.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