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일본이 예고대로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관보에 게재하면서 한·일 사이의 외교적 공백을 우려하는 시각이 팽배하다. 일본의 일련의 조치로 우리로서는 ‘확전’과 ‘극일(克日)’만이 선택지라는 극단적 시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외교적 운신의 폭은 크게 줄었더라도 그 공간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한·일 정부의 거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는 8월엔 공교롭게도 양국 관계의 주요 변수가 될 일정들이 포진해 있다. 28일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 발효까지 국면마다 취해질 선택이 향후 양국 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도 강하다.

◆새 외교 채널 열어야
일본 내각의 결정이 이날 관보에 고시된 이상 오는 28일 개정안 발효까지 절차가 진행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조치를 취소하려면 새로운 각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이번 결정의 상징적 의미를 볼 때 아베 정권이 이를 되돌릴 가능성도 높지 않다. 하지만 외교적 합의가 있으면 결정의 ‘밀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기대도 나오고 있다. 이날 일본 정부가 관보에 게재한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에는 당초 적시될 것으로 전망된 개별허가 품목이 따로 명시되지 않았다.
새로운 외교 채널을 열어 다시 대화에 나설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교 당국 간 대화 채널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이번 국면에서 힘을 소진한 데다 일본 외무성이 이번 수출 규제 조치에 갖고 있는 영향력이 크지 않은 만큼 상시 채널을 넘어서는 ‘제3의 채널’을 찾을 필요성이 제기된다. 진창수 세종연구원 일본연구센터장은 “수면 아래에서 물밑 중재를 할 새로운 채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8월 한·일이 겉으로 냉각기를 지나는 동안 내부적으로 협상을 맡을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채널은 ‘특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복잡한 한·일 관계의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청와대의 심중을 일본에 잘 전달할 수 있고, 일본 역시 청와대의 심중을 반영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인물이 적임자로 꼽힌다. 과거 양국관계가 어려울 때는 한·일 의원연맹 소속 등 지일파 국회의원들이 이 같은 역할을 맡았지만, 최근 일본 방문에서 일본 측과 벌인 신경전 등을 고려할 때 지금은 이들의 역할이 높게 평가되지 않고 있다.
지일파인 이낙연 국무총리가 꾸준히 적임자로 거론되지만, 총리직이 수면 위로 드러난 자리인 데다 이미 여러 번 언급되면서 카드가 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의 상황대응 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은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 등도 새로 거론되고 있다.

◆일본과 논의할 ‘카드’는
채널을 만든 뒤에는 일본에 내걸 ‘카드’가 필요하다. 일본과 타협안을 만드는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국민적 토론을 거쳐야 하는 난제다. 진창수 센터장은 “이 문제(타협안을 만드는 것)는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결단을 내리는 문제”라고 말했다. 일본은 1965년 청구권협정 체제에서 경제적 급부를 이미 내놓은 만큼 자국이 경제적 피해를 볼 수 없다는 입장을 기본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결국 갈등 원인인 강제동원 문제에서 일본과 타협 가능한 안을 한국이 제시하지 않는 이상 일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1+1 안(한·일 기업의 자발적 출연으로 피해자 지원 기금을 만드는 안)’을 제시해 왔다. 정부는 안을 이미 낸 이상 일본이 이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대화를 거쳐 수정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안을 만들기 어려우면 시간을 갖자는 제안을 할 수 있다.

정부는 28일 시한까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 역시 검토할 수 있다. 이 역시 8월 한·일 관계 변수 중 하나다. 당초 GSOMIA는 한·미·일 삼각 공조의 틀에서 미국이 중재 역할을 하도록 움직이게 하기 위한 카드였다. 하지만 이미 미국의 중재가 한 차례 틀어진 데다 GSOMIA를 한·일 협상에서 카드로 자주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협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가 가진 카드이지만, 너무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우려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한·미·일이 공조하는 전제 자체가 안보협력인데, 이 틀을 깨겠다는 얘기를 자주 하는 것은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8월 역사 기념일… 여론 관리 필요
8월 한·일 관계 이벤트 중 가장 주목되는 행사의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다. 28일 시행령 발효 전 한·일 분위기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메시지 수위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즈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여부도 다시 한 번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아베 총리의 극우 성향 때문에 신사 참배를 강행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중국을 의식해 올해 신사 참배까지는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독도 관련 기술이 들어갈 일본 국방백서도 이달 출간될 예정이다. 줄줄이 예정된 8월 양국 관계 ‘대형 폭탄’ 속에서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외교적 대화의 여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한·일 후속 외교전의 주요한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치인 反日 저주성 발언 도움 안 돼… 자제해야”
“지금은 확전시키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정치인들의 불필요한 반일(反日) 수사는 자기 만족일 뿐입니다.”
신각수(사진) 전 주일대사는 7일 세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지금은 실질적인 대응에 국력을 모아야 할 때”라며 이같이 밝혔다. 신 전 대사는 일본에서 재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고조된 한·일 갈등을 관리한 경험이 있다.
그는 “한·일 갈등이 위기로 치닫는 상황에서 정치권의 정제되지 않은 ‘반일 저주성 발언’은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위한 외교적 공간을 위축시킨다”며 “일본의 우익은 한국에서 나오는 이런 발언들을 이용해 자국 내에서 혐한론과 반한론을 확대시키는 도구로 이용한다”고 우려했다. 최근 정치권에서 경쟁적으로 반일 메시지가 나오고 있는 데 대한 우려다.

신 전 대사는 또 “싸움은 밑에서 하더라도, 가급적이면 고위직 인사는 발언을 자제하며 대화와 소통의 공간을 열어가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2일 각의 결정 직후와 5일 두 차례 직접 대일 메시지를 내놓았다.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극한 발언’은 주로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나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 총리 보좌관 등이 대신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외교가에서는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문 대통령의 광복절 메시지를 주목하고 있다. 대통령이 내놓을 광복절 메시지는 28일 예정된 일본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 발효를 앞두고 한·일 관계에 가장 큰 변수로 꼽힌다.
신 전 대사는 “한·일 관계를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일본을 도덕적으로, 점잖게 꾸짖는 세련된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난만 하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며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사태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신 전 대사는 “한·일 관계 악화는 우리 경제에 당장 피해를 가져올 뿐 아니라 북·중·러 삼각형에 대항하는 한·미·일 남방 삼각형을 약화시키면서 동북아 전체의 안보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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