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아시아 인재를 키우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청년들은 선배들이 겪었던 것처럼 냉혹한 국제 현실에 다시는 유린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재일 교육사업가이자 교육가인 신경호(56) 금정(金井)학원 이사장이 말했다. 일본에서 36년 세월을 보낸 그는 대한해협을 넘나들며 한·일 교육·문화계에 뿌리를 내린 인물이다. 직함도 금정학원 이사장 외에 일본 고쿠시칸(國士館)대 교수, 수림외어(秀林外語)전문학교 이사장(교장), 한국 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 등 여러 개다.
지난해 신 이사장과 두 번째 만남을 했을 때다. 한 동석자가 사케(酒)를 니혼슈(日本酒)라고 부르자 발끈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는 녹차를 일본차, 김치를 기무치를 부르는 것과 같다는 이유에서다. 사케는 우리말로 청주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 오래 생활한 분들을 만나면 상당수가 일본의 의식과 논리에 동화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그의 모습이 남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다.
신 이사장을 만난 1일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반도체 핵심 소재(素材) 등의 수출규제 강화 방침을 발표한 날이다. 도쿄에는 온종일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며 우중충했다. 심란한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한 날씨였다.
역시 가장 궁금한 것은 일본에는 왜 건너왔을까이다.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광주에서 고교를 다닐 때 5·18민주화운동의 충격적 상황을 경험했다. 그 후 광주에서 대학에 들어갔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본에 있던 큰 형이 이러다가는 (동생) 송장 하나 치우나 싶어 할아버지,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래서 일본에 왔다”고 했다. 냉전의 한복판인 1983년 일이다.
한국에서는 토목학을 1년 공부했다. 일본에서는 니혼(日本)대 법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사회과학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우리 의지가 아닌 남의 나라 주도로 나라가 유린당하고 국가지도자는 거기에 빌붙어 사는 모습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전공 변경의 변(辯)이다.
당시 130여명에 불과했던 도쿄 유학생의 생활은 고단했다. 영화배우 최지희가 도쿄 아카사카(赤坂)에 낸 불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독한 세제로 산더미같이 쌓인 설거지를 했다. 손이 다 갈라져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하는 게 창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일본은 지금도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혐오 발언)라는 말도 되지 않은 배타성이 존재하지만 그때는 더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형의 영향으로 재일한국유학생회의 섭외부장, 사무국장 등 간부직을 맡으며 재일동포 사회 관계자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바로 이 기회가 신 이사장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인연으로 이끌었다. 재일동포 사업가 고(故) 김희수(1924∼2012) 전 중앙대 이사장과의 만남이다. 김 전 이사장은 경남 창원, 신 이사장은 전남 고흥 출신. 한 세대를 뛰어넘은 영호남의 의기투합이었다. 2015년 1월 김 전 이사장 3주기를 맞아 발간된 ‘민족사랑 큰 빛 인간 김희수’라는 추모 문집에서 신 이사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선생님은 ‘여러분은 한국 미래의 기둥이다’ ‘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라고 하시며 여러모로 지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히 저를 가까이 두며 많이 신뢰해 주시고 결혼식 주례도 서 주셨습니다.”
1938년 일본으로 건너온 김 전 이사장은 1960년대 부동산임대업 등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학원 명칭인 금정은 김 전 이사장의 일본 성(姓)인 가나이(金井)에서 비롯됐다.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1986년 금정학원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1987년 서울에서 중앙대를 인수하고, 1988년엔 도쿄에 수림외어전문학교 문을 연다. 수림외어전문학교는 일본에서 전수(專修)학교 이상의 교육기관 중 한국어과라는 이름으로 학과가 개설된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보통은 조선어과라는 학과명이 붙는다.
신 이사장은 수림외어전문학교 개교를 준비하고 카운셀러, 교무부장, 부교장을 거처 2005년부터 금정학원 이사장과 산하의 수림외어전문학교·수림일본어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가 꽃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1990년대 초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로 김 전 이사장의 사업체가 위기에 몰린 뒤 근근이 유지되던 학교는 설상가상 1990년대 말 한국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신 이사장은 “금융위기가 터지자 한국 학생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폐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국민은행 도쿄지점에서 빌린 돈 1억5000만엔과 교직원 퇴직금 등 총 3억5000만엔이 필요했다. 그 돈이 없어서 문을 못 닫았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중국과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다. 통역 한 명만 대동하고 중국과 베트남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학, 유학원 관계자를 만나 학생을 보내 달라고 구걸 아닌 구걸을 했다. 중국에서는 독한 ‘바이주(白酒) 시험대’에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백의종군한 뒤 돌아와 배 12척만 달랑 남은 이순신 장군의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애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젊은 나이에 한국 시골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학교 설립에 투신한 청운의 꿈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 이 학교가 망하면 재일 한국인이 일본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열정이 통했는지 중국과 베트남의 유학생을 유치하면서 학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현재 일한통역번역학과, 일중통역번역학과 등이 설치돼 있고 이 학교를 거쳐 간 학생이 1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중앙대를 인수했던 김 전 이사장은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2008년 5월 두산그룹에 학교법인 경영권을 넘겨주고 손을 털었다. 말년인 2009년 두산그룹에서 경영권 양도금으로 받은 자금으로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한 뒤 문화사업에 매진하던 중 2012년 사망했다. 신 이사장은 현재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은 수림문화재단의 상임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재단 창립 10주년 기념식과 공연이 있었다.
신 이사장은 고쿠시칸대 21세기아시아학부 교수로 교육사업자가 아닌 교육자의 역할도 하고 있다. 1999년 수림외어전문학교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생계유지를 위한 시간강사로 시작해 2002년부터 부교수로 전임 발령이 나서 재직 중이다.
그는 아시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2002년부터 그 일환으로 학부 재학생을 고려대에서 한 달간 연수하는 프로그램을 계속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으로 한국을 다녀간 학생이 1800명에 달한다.
“한국에 공부하러 가는 학생들에게 오전에는 한국어 공부하고 오후에는 역사박물관도 가서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한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라고 조언한다. 불편하다고 서로 숨기고 도망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불편하더라도 서로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미란 진리, 정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치는 게 교수라는 직업이다.”
신 이사장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한·일의 연(緣)을 강조한다. “일본에 철, 벼, 한자, 불교와 같은 선진 문명을 전수한 도래인(渡來人)이 찬란한 일본 문화 형성의 원동력이 됐다. 그런 점에서 한민족은 정말 우수한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1983년 도일 이래 우여곡절의 양국 관계를 지켜본 신 이사장은 최근 일본의 무역 보복에도 할 말이 많을 듯했다.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입 규제 강화를 무겁게 본다. 그런데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대일(對日) 무역 흑자를 낸 적이 없다. 이번 위기를 통해 소재·부품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한·일관계의 장래를 밝게 봤다. 새로운 세대의 한·일 교류는 정치적 적개심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일본에서는 소수이지만 한국을 깊고 좁게 예리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우리는 일본을 약간 설렁설렁 보는 경향이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에 사는 육영가(育英家)이자 교육자로서 고국의 후배 청년들에게 고언도 남겼다. “땀을 흘리는 데 인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을 종식하고 겨레가 웅비하는 새 시대를 열 미래의 주역은 지금의 젊은이들”이라며 “부단히 땀을 흘려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엄혹한 국제 현실에 유린당했던 역사적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넓은 마음과 뜨거운 열정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후배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도쿄=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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