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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무총리들이 밝힌 '내가 대권을 못 잡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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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04 15:34:16 수정 : 2019-02-06 1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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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출신으로 모처럼 정치권 한복판 뛰어든 황교안 / 고건·이한동·이회창 등 실패 넘어 '가지 않은 길' 밟을까
‘정치 초년생’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당권에 도전하고, 나아가 2022년 대선에도 출마할 것이 확실시되면서 역대 국무총리의 정치 역정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총리는 흔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자리이나 그 ‘일인’, 즉 대통령한테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5년 단임 대통령제 아래에서 일단 총리에 임명되면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오르는 것이 1987년 민주화 이후 오랫동안 한국의 정치 관행이었다. 실제로 그간 여러 명의 전직 총리가 대권에 도전했으나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다.

황 전 총리의 앞날을 두고 한국당 내에서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침 지난 2017∼2018년 한때 정치에 뛰어들었던 전직 총리들의 회고록이 한꺼번에 쏟아져 정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전직 총리들은 끝내 ‘1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2인자’에 그치고만 이유가 무엇인지 비교적 담담하게 기술했다. 황 전 총리가 향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 나갈지 어렴풋이 예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국무총리 출신으로 한때 유력한 대권주자였으나 끝내 청와대 문턱을 넘지 못한 인사들. 왼쪽부터 이회창, 이한동, 고건 전 총리. 세계일보 자료사진
◆기성 정치권의 높은 벽 끝내 못 넘은 고건

총리 출신으로 가장 최근에 대권과 근접했던 이가 고건(81) 전 총리다. 4일 정계에 따르면 그는 2017년 11월 펴낸 ‘고건 회고록 : 공인의 길’(나남)에서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음에도 끝내 출마를 포기한 경위를 담담히 소개했다.

“국민들로부터 과분한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활동도 안 하고 출마 의사도 표시를 안 했는데 지지율 1위를 달렸다. 17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이명박·박근혜·정동영·손학규 등 여야의 경쟁자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선두주자였다. 내가 짊어져야 할 역할이 있다고 판단했다. 소명의식을 느꼈다. 나는 2007년 대선 출마를 결심했다·” (‘고건 회고록’ 중에서)

고 전 총리는 당시 노무현정부의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아무런 ‘지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원내 활동이 가능한 국회의원인 것도 아니었다. 체면 불구하고 평당원으로 여당에 입당해 당권을 거머쥐든지 아니면 여당 의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없고 추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아예 고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국민대통합 신당을 추진했다. 2006년 말 나는 정치인들에게 원탁회의를 제시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기성 정치인과 정당의 호응은 적었다. 국회의원 선거(2008년)까지 2년여 시간이 남아 있었다. 미리 정치적 입지를 결정하는 위험 부담을 현역 의원들은 지지 않으려고 했다.” (‘고건 회고록’ 중에서)

결국 고 전 총리는 ‘정치적 구심력을 상실했고 독자적 세력을 확보하는 데에도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대선 출마의 뜻을 접기로 한 그는 2007년 1월16일 기자회견에서 “기성 정치권의 벽이 지나치게 높아 저로서는 역부족임을 실감했다”며 “불출마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언론은 고 전 총리의 선택을 ‘권력의지가 약한 비(非)정당정치인의 중도하차’라고 표현했다. 회고록에서 고 전 총리는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며 “직업정치인들처럼 권력투쟁 의지가 강하지 못했다”고 자평했다.

◆이한동 "나는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이한동(85) 전 총리는 김대중정부에서 2000년 5월부터 2002년 7월까지 2년2개월간 총리를 지냈다. 역대 총리를 크게 ‘정치가’와 ‘행정가’로 나눈다면 그는 김종필 전 총리, 이낙연 현 총리 등과 더불어 두 가지 자질을 동시에 갖춘 정치가 겸 행정가 총리였다.

먼저 5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집권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정책위 의장을 모두 역임했으며 국회부의장까지 맡았다. 여기에 젊은 시절에는 오랫동안 판검사로 일했고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입각한 경험도 있다.

이처럼 뛰어난 ‘스펙’을 자랑함에도 하나로국민연합이란 정당 후보로 출마했던 2002년 대선에선 7만4000여 표를 얻는데 그쳐 후보 6명 중 4등으로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이 전 총리는 지난해 10월 펴낸 회고록 ‘정치는 중업이다’(승연사)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은 하늘 또는 절대자가 결정하는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됐다고 토로했다. 스펙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못하다고 여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는 장면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총리 시절 노무현을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제청해 임명받게 했고, 그후 정부에서 같이 일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을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전혀 없다. 그런 노무현이 현실에서는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정치는 중업이다’ 중에서)

이 전 총리는 자신의 패인을 한마디로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했다’는 데에서 찾았다. 지역감정에 떠밀려 낙선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서울 대신 부산에서 출마를 강행, ‘바보’라는 말까지 들었던 노무현과 비교해 ‘스토리’가 너무 빈약했다는 만시지탄이다.

“국민들은 선거에 있어서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표심을 결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나의 정치 행보는 옳고 바르지만 너무 밋밋하고 감동이 없었기에 대중적 인기를 전혀 끌지 못했고, 요직을 맡아 무슨 일이든 제대로 잘하는 사람 정도로 국민들의 머릿속에 엷게 각인되었을 뿐이라고 짐작된다.” (‘정치는 중업이다’ 중에서)

◆'기득권 대표주자' 이미지 못 벗은 이회창

이회창(84) 전 총리는 스펙 면에서 이한동 전 총리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판사,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보통 사람은 평생 한 가지만 가져도 ‘가문의 영광’으로 자랑스럽게 여길 직함들을 모조리 손에 쥐었다. 딱 하나, 대통령만 빼고 말이다.

이회창 전 총리는 대선에 1997년, 2002년, 2007년 이렇게 3차례 도전해 모두 낙선했다. 이명박 후보와 겨뤄 패한 2007년 대선은 본인 스스로 ‘질 것을 알고 출마했다’고 밝힌 만큼 논외로 하고 1997년과 2002년 대선이 중요하다. 그는 2017년 8월 펴낸 ‘이회창 회고록’(김영사)에서 자신이 두 차례 대선에서 왜 졌는지 비교적 담담히 분석해놓았다.

1997년 대선은 기존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여럿 벌어졌다. ‘상극’으로 여겨진 김대중과 김종필이 ‘DJP 연합’이란 이름 아래 뭉쳤다. 이인제는 여당의 당내 경선에서 패하자 결과에 불복하고 뛰쳐나가 신당을 창당하고 그 대표 자격으로 출마했다. 한마디로 범보수진영이 이회창, 이인제, 김종필 이렇게 3대 세력으로 분열됐다.

이를 두고 ‘이회창이 포용력이 부족해 우군을 붙잡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의 아들이 석연치않은 이유로 군입대 면제 판정을 받은 것도 주요 패인으로 지목됐다. 이회창 전 총리 본인의 평가는 어떨까.

“이인제의 배신과 DJP 연합이 나의 포용력 부족이라고 지적한 대목은 솔직히 나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념과 정의를 팽개친 사람들의 야합을 막지 못한 것은 원칙과 정의의 문제이지 포용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찌되었든 그것을 막지 못한 내가 패자가 된 것은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요컨대 선거에 진 것은 나의 잘못이지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이회창 회고록’ 중에서)
2002년 대선은 1997년 대선보다는 이회창 후보한테 유리한 환경이었다는 게 다수 정치분석가들의 평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여러 비리 의혹으로 이른바 ‘홍삼 트리오’라는 비아냥이 거세지며 정권 지지율이 곤두박질 친 탓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김대중과 뜻을 함께하는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차로 이겼다.

“유권자 중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층, 이른바 중도층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나는 이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선거는 설득인데 그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미지에서도 노무현 후보 측이 내세운 귀족과 서민, 기득권과 개혁세력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기득 세력의 대표주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인터넷 매체의 활용에서 뒤진 것도 주요한 패인이었다. 결국 2002년 대선의 승패를 가른 것은 이런 이미지와 연출의 대결이었다.” (‘이회창 회고록’ 중에서)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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