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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암시로 ‘식민지 조선’ 울분 표출한 무성영화의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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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22 15:00:00 수정 : 2019-01-22 17: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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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① 민족 영화 상징 나운규의 ‘아리랑’ / 천재 감독 나운규가 1926년 만든 처녀작 / 엑스트라 800여명 동원 3개월 만에 완성 / 단성사서 개봉되자마자 장안의 화제로 / 당시 신문·영화인 “조선 최고작품” 극찬 / 6·25 후에도 상영했지만 필름 보존 안 돼 /‘개와 고양이 자막'·미친 주인공 독백 통해 / 나라 빼앗긴 비애·독립에 대한 열망 표현 / '환상 장면' 나운규 편집 전환 실력 보여줘
2019년 기해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그리고 한국영화 100년의 해다. 세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영화 10편을 골라 영화사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당시 제작 환경과 분위기, 주요 인물들을 함께 소개한다.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필름이 보존되지 않았지만 민족 영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한때는 아베 요시시게(阿部善重)라는 일본인이 전체 8권 중 3권 분량의 필름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기대를 모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1910년대부터 서울 충무로에서 요도야(淀屋)라는 모자점을 경영하고 있던 일본인 요도 도라조오(淀虎藏)가 설립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농중조’(1926)에 이어 두 번째 제작한 ‘아리랑’은 6·25전쟁 이후 1952년 9월에도 대구 만경관(萬鏡?)에서 1주일간 재상영(영남일보)한 사실이 있으나 그 뒤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실체가 없음에도 ‘아리랑’이 명화였음은 개봉 당시 신문의 평가와 영화인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아일보(김을한, 1926년 10월7일)와 매일신보(포빙, 10월10일)는 각기 ‘사막의 장면은 전 조선영화를 통하여 가장 우수’했고 ‘대체로 보아 이 일편은 별로 흠잡을 곳이 없는 가작’이라고 했으며, 영화감독 김유영(金幽影) 역시 ‘관중의 가슴에 폭풍우와 같은 고동과 감명을 준 명작’(명배우 명감독이 모여 조선 영화를 말함 : 삼천리, 1936년 11월호)이라고 과찬했다. 이경손 또한 ‘구극조를 탈피한 첫 작품’으로 ‘마치 어느 의혈단원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무성영화시대의 자전’ 신동아 1964년, 346쪽)고 높이 평가하였다. 1938년 11월 조선일보가 영화제(부민관) 개최에 앞서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영화의 선호도 조사 결과도 ‘아리랑’(4974표)이 ‘임자 없는 나룻배’(3783)를 제치고 무성영화 부문 1위였다. 이처럼 ‘아리랑’의 명성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아리랑’ 개봉 당일인 1926년 10월1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광고. 김종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임고문이 한국영상자료원에 제공한 희귀 자료다.
김종원 제공

이 영화는 단성사의 개봉에 앞서 선전용으로 만든 전단 1만장이 공안(公安)을 해칠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압수당한 데 이어 10월1일 개봉 당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광고 문안도 삭제되는 불운을 겪었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가고/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라는 ‘아리랑’ 가사 5절이 사라진 것이다.

◆주인공을 미치광이로 설정한 절묘한 구성

그렇다면 감독 명의를 일본인 스모리 슈이치(津守秀一)로 내세웠던 나운규의 감독 처녀작 ‘아리랑’은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만들어졌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내용과 축음기 제작을 위해 집필한 문일의 ‘영화소설 아리랑’(박문서관, 1929년 11월15일) 등을 종합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아리랑’의 각본과 감독, 주연을 맡은 나운규

이 영화는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에 이어 주인공인 최영진(나운규 분)과 악덕 마름인 오기호(주인규)가 서로 노려보는 클로즈업 장면으로 시작된다. 서울에서 가까운 농촌 마을, 그동안 멀쩡했으나 분명치 않은 이유로 실성한 후 마을 사람들의 놀림감이 된 영진은 아버지(이규설)의 빚을 빌미로 누이동생 영희(신일선)를 괴롭히는 지주(홍명선)의 마름 오기호만은 유독 원수처럼 여긴다. 기호는 이런 영진에게 하인을 풀어 끌어다가 매질을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도 협박한다. 영진의 아버지는 원래 중농이었으나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논밭을 처분하고 지주의 돈까지 빌려 쓰는 소작농 신세가 되었다.
영화 ‘아리랑’에서 남매로 출연한 나운규 감독과 배우 신일선

영진은 어느 사립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중도에 퇴학당하고 귀향한 뒤부터 정신이상이 생긴다. 그가 왜 미쳤는지,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미쳤다고 하는가 하면, 젊은 혈기 때문에 박해를 받다가 돌아버렸다고 다르게 말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여름 방학을 맞은 전문학교 학생 윤현구(남궁운)가 돌아온다. 그는 막역한 고향 친구 영진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당황한다. 현구는 영진의 누이동생 영희(신일선)를 사랑했다. 4년 전,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함께 유학의 길을 떠났던 아들과 친구의 달라진 운명 앞에 영진의 아버지는 할 말을 잃는다.

어느새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 풍년축제가 벌어진 날, 영희 앞에 기호가 나타난다. 빚을 빌미로 아버지에게 딸과의 혼인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데 앙심을 품고 있던 그가 기회를 엿보다가 혼자 집을 지키는 영희에게 들이닥친 것이다. 야욕을 채우기 위해 맹수같이 달려드는 사나이에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려 할 때 현구가 나타난다. 하지만 기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때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만 있던 영진이 기호가 땅바닥에 깔린 현구를 향해 도끼를 내려치려는 순간 들고 있던 낫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만다. 졸지에 살인범이 된 영진은 잠시 제 정신으로 돌아왔으나 순사에게 체포돼 여동생과 현구, 청년회의 깃발을 든 마을 젊은이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의 배우 신일선과 남궁운

◆비유와 암시로 빚은 사막의 환상 장면

변사의 해설에 의존해야 하는 무성영화 ‘아리랑’은 당시의 한국영화 수준으로 볼 때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정서와 특유의 기법이 있었다. 곧 비유와 암시, 상징의 몽타주가 그것이다. 첫째, 비유의 예로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을 들 수 있다. 서로 앙숙인 개와 고양이를 내세워 영진과 지주의 앞잡이 오기호를 대립 관계로 보여줌으로써, 지배자인 일본 제국주의와 피지배자인 한민족을 상기시키게 했다. 둘째는 미친 영진으로 하여금 반복하게 한 독백의 암시이다. 주인공은 누구에게인지 “아 배고파! 목이 말라 죽겠다. 물을 물…”이라며 갈증을 호소하는가 하면 “진시황도 죽었다지” 하고 중얼거린다. 이는 갈증을 통해 빼앗긴 나라의 비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시사하고 일제의 패망을 암시한 것이다. 셋째는 상징적인 사막 장면의 몽타주이다. 나운규는 화면의 편집과 구성뿐 아니라 편집의 전환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그가 설정한 사막과 물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환상 장면은 영희를 범하려던 기호가 영진의 낫에 찔려 죽는 현실 상황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멀리서부터 아라비아 상인 모습의 험상궂은 기호와 나그네인 영진이 걸어오고, 화면 앞에 다가선 나그네는 목을 쥐며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무정하게도 상인은 물을 주기는커녕 나그네를 발길로 걷어차 버린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젊은 남녀가 나타나, 상인에게 역시 물 한 모금을 마시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들은 현구와 영희이다. 상인은 물병을 들어 모래 바닥에 쏟아 보이며, “저 사나이를 버리고 나를 따른다면 물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갈증을 견디다 못한 영희가 상인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자, 분개한 현구가 상인에게 달려들면서 격투가 벌어진다. 먼저 상인에게 물을 간청했다가 발길에 채여 쓰러졌던 나그네(영진)도 일어나 공격을 가한다. 기세 좋게 대응하던 상인은 어느새 나그네가 휘두른 칼날에 맞아 목숨이 끊긴다.
민족 영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아리랑’(1926)을 만든 나운규의 생전 모습

이 사막 장면에서 탐욕스러운 아라비아 상인은 일제의 경찰을 암시하는 검은 옷을 입었고, 나그네와 젊은 여인들에게는 각기 흰 옷을 입혀 백의민족인 조선 사람임을 상징케 했다. 나운규는 몽타주나 포토제니에 대해 그가 알 턱이 없고 정식으로 영화 수업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니지만 영화적 센스는 천재적이었다. ‘아리랑’만 보더라도 그는 벌써 여기에 ‘대조적 몽타주’를 구사한 것이다. 작품의 첫 머리에 ‘개와 고양이’를 그린 것은 그가 ‘유도 모티브’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안종화 ‘춘사 나운규’ <사상계>, 271쪽, 1962년 6월호)

800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3개월 만에 완성된 ‘아리랑’은 단성사에서 개봉되자 서울 장안의 화제를 모으며 그 주제가 ‘아리랑’도 전국적인 애창곡이 되었다. 민요 ‘아리랑’의 근원인 ‘정선아리랑’을 무색하게 만든 ‘본조 아리랑’은 어느새 남과 북이 애창하는 겨레의 노래가 되었다.

김종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임고문, 영화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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