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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세상에 알린 ‘파란눈의 동지’들 [3·1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 신년특집]

입력 : 2019-01-08 18:19:52 수정 : 2019-01-07 17: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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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독립운동 세상에 알린 이방인들 / 임정수립후 국제사회 관심 확산 / 美·英·佛 등서 한국 친우회 결성 / 독립운동 적극지원·日만행 고발 1919년 9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참석자들 사이에 일제에 불법 강점을 당한 한국의 상황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셀던 스펜서 의원:“의장님, 본인은 한국의 정세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진술과 개요를 받은 바… 외교위원회가 이를 참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의장:“그 진술서를 채택하여 의사록에 인쇄할 것이며, 참고자료로 활용할 것입니다.”

미주리주 출신의 상원의원인 스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법률고문인 프레드 돌프가 작성한 보고서 ‘한국문제-대한민국에 관한 진술 및 개요’를 미국 의회가 당시 한국 문제를 판단하는 증거물로 활용하기를 바랐고, 이달 19일자 회의록에 수록됐다. 돌프의 보고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고발하면서 1882년 한·미 간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위한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3·1운동과 그 정신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한국을 보는 국제사회의 달라진 시선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일본의 불법적 지배와 참혹한 실상에 대한 비판이 커져갔고, 친한 여론이 급격히 형성됐다. 임시정부의 출범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외교활동도 가능해졌다. 이런 변화에는 “자유가 억압받고 인권이 말살되는 것에 대한 인류 양심의 발로”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이방인들의 역할이 특별히 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법률고문을 지낸 프레드 돌프(앞줄 오른쪽)가 이승만 등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3·1운동, 국제사회에 한국을 공론화하다

3·1운동은 미국인들이 한국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였다.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이 보다 구체화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미국 정치권의 대표적인 친한 인사는 한국 문제를 의회에서 처음 제기한 스펜서 의원이다. 그는 1919년 6월 3·1운동을 언급하며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지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원결의안 제100호를 제출했다. 비록 외교위원회의 승인을 받지는 못했으나 의회에서 한국 문제의 논의를 여는 단초가 됐다. 

미국 미주리주 출신의 상원의원 셀던 스펜서는 의회에서 한국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했던 정치인이다.
일리노이주 출신의 변호사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법률 자문이었던 돌프는 이런 활동의 토대가 된 인물이다. 그가 작성한 ‘한국문제’(1919), ‘일본의 한국경영’(1920), ‘극동에서의 대차대조표’(〃) 세 가지 문건이 특히 주목된다. ‘일본의 한국경영’은 일제가 한국, 한국인을 경제적으로 어떻게 수탈했는지를 파헤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돌프는 친한파인 자신의 글이 객관성·공정성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해 일본 정부의 자료, 보고서 등을 기초로 했다. 일제의 선전, 홍보 내용을 분석한 그의 지적은 신랄했다.

“일본은 한국의… 산업에 6700만달러를 사용했다는 점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세금 인상 및 국가 채무 확대라는 방식으로 투자한 액수보다 3800만달러를 더 수탈했다.”

돌프는 이 글들을 미국 지도자들도 읽기를 바랐고 대통령, 국무장관 등에게도 보내 일독을 권했다. 의회에서는 한국 문제를 다루는 기초 자료로 활용됐다. 미국 정부 내에서도 주목을 받아 1921년 5월 국무부 극동국은 국무장관에서 보낸 내부 비망록에 돌프의 문건을 첨부하며 “관심이 요망된다”고 언급했다. 

◆한국친우회, “잘 무장된 군대와 맞먹을 정도로 강력하다”

제도권 내의 움직임과 더불어 민간에서 ‘한국친우회’가 결성되기 시작해 친한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으로 3·1운동 이후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친우회의 설립 구상은 ‘제1차 한인회의’가 열린 뒤 서재필이 조직적인 활동과 선전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미국 내 친한 외국인들을 많이 확보해야 될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나왔으나 애초 이런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플로이드 톰킨스 목사로 알려져 있다. 그가 회장을 맡은 필라델피아 친우회가 1919년 5월 16일 결성되어 물꼬를 텄고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캔자스시티, 뉴욕 등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1921년 11월 워싱턴 군축회의의 미국 대표단 단장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톰킨스 목사는 “본 단체는 미국 시민만으로 구성돼 2만5000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고 소개한 뒤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기구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인 자유와 정의를 위해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서재필이 그를 두고 “자유와 독립을 얻기 위한 잘 무장된 군인들로 구성된 몇 개의 연대와도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친우회에 대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언급이다.

미국에 비해 규모가 적기는 했으나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도 친우회가 조직됐다. 영국의 친우회는 1920년 10월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모티프가 된 의병 사진을 찍은 언론인 프레데릭 아서 맥켄지도 포함됐다. 그는 창립대회 연설에서 “나는 조선인의 자유 및 정의를 위해 친우회를 조직함으로써 그들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고 다짐했다. 맥켄지는 2014년 3·1절을 맞아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당시 영국인들의 이런 활동은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부의 정책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형성하면서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한” 친우회의 결성은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에서 한국친우회 결성에 참여했던 프레데릭 아서 맥켄지는 한국 내 의병활동을 국제사회에 전한 언론인이다
임시정부가 위원부를 설치해 운영했던 프랑스 파리는 유럽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1921년 6월 파리친우회 결성을 주도한 이는 하원 의원 루이 마랭이었다. 펠리씨앙 로베르 샬레도 빼놓을 수 없는데, 임시정부의 보고서 ‘구주의 우리사업’에 따르면 그는 3·1운동 당시 한국에 체류하며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염원과 일제의 폭력적인 진압을 직접 목격했다.

친우회의 결성은 해당 지역에서 한국에 대한 지지여론 형성으로 이어졌다. 1919년 뉴욕육해공군방위협회는 서재필을 연사로 초청해 집회를 가진 뒤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했고, 1920년에는 워싱턴에서 한국인을 돕기 위한 한인구제회가 설립됐다. 유럽의 친우회 참여 인물들은 자국 정부의 대외정책과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어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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