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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당시 참가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3·1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참여한 전 국민적 운동이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가장 유연하고, 문명적인 맨손혁명”
“각기 3000명씩 무리를 나누어 외국 영사관으로 향했다. 각국 영사들이 밖으로 나와 그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 어느 모로 보나 시위는 ‘무저항적’인 것이었다.”
미국의 언론인 C W 켄달이 1919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에 담은 3·1운동의 풍경이다. 대규모 인원이 무리를 나누어 행진하고, 각국 외교관이 그들에게 인사를 보냈다는 것에서 조직적이고 평화적인 3·1운동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이방인들이 목격한 3·1운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켄달은 “그들의 계획은 ‘비폭력 혁명’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 설령 맞거나 투옥되거나 심지어 죽음을 당할지라도… 한국의 이름과 독립운동의 명예를 더립힐지도 모르는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중국의 중화신보는 “맨손혁명(徒手革命)”이라 지칭하며 “20세기의 최신식 혁명이다. … 한국민족의 이번 20세기식 맨손혁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연하고, 문명하고, 유력한 하나의 혁명이라 하겠다”(3월14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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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참가한 기생들의 행진 모습. 여성들은 3·1운동의 한 주체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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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대해 일제는 야만적인 폭력으로 대응했고 참가자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양적, 질적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일제의 지배가 ‘한국의 문명화’에 도움이 될 것이며, 독립운동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에서 크게 바뀐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한국 관련 기사량을 분석한 한 논문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단 1건에 불과했던 한국 관련 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게재돼” 3, 4월에만 25개의 기사가 실렸다. 중국 언론은 보도의 “범위가 넓고 수량이 많아 마치 한국 현지 언론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문영걸 미도중국선교연구소 소장은 지난 3월 한 학술지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3∼5월 중국 신문들은 많게는 104개(민국일보)의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고 분석했다.
이런 보도들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지지, 한국의 역사·문화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다. 3월 이후 미국 내 한국에 대한 지지와 독립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을 보여준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6월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의 헌법 전문을 게재하거나 의회의 한국 독립 관련 논의 등을 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6월15일의 한 기사는 한국의 독립 요구를 상세히 소개하고, 일본의 불법 강점을 지적했는데 결론 부분에서 미국의 책임까지 거론한 점이 주목된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연구위원은 “(1차 대전 뒤처리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 등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의제로 설정하고, 실질적 성과를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3·1운동으로 우호적인 국제여론이 형성된 것은 분명하다”며 “이는 1943년 카이로회담(2차대전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한 회담)에서 식민지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이 독립을 보장받는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중국 언론의 관심이 컸던 것은 인접국이기도 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세계 열강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고, 내부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국력이 기울어가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 언론은 3·1운동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자국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이 한국을 속국인 양 취급했던 터라 이런 접근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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