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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국제사회는 한국·한국인에게 감탄했다 [3·1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 신년특집]

관련이슈 신통일한국시대 열다 , 참사랑 , 3.1운동 100주년

입력 : 2019-01-01 14:00:00 수정 : 2019-02-15 17: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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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세계에 보여준 가장 유연하고 문명적인 맨손혁명” / 이방인들이 목격한 3·1운동 / 당시 美·中 등 각국 언론 큰 관심 / 무저항·평화행진에 국제사회 감탄 / “3000명씩 무리 지어 영사관으로…각국 외교관도 밖으로 나와 인사” / 20세기의 최신식 혁명으로 평가 / 한국독립·임시정부 우호여론 확산 / NYT “조직·실행력·일관성에 감탄” / 중화신보 “동아시아 민족 각성시켜” 1919년, 국제사회는 경이로운 눈으로 한국을 주목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캐나다 출신 암스트롱 목사의 증언을 빌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조직력과 실행능력, 일관성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4월25일)고 전했다.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며 동병상련의 처지이던 중국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한국이 독립을 이룩할지 몰라도 중국은 끝내는 망하고 말 것이다. 한국에 비하여 중국은 이러한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영웅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익세보, 4월1일)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일제는 식민지정책의 변화를 모색했다. 도쿄아사히신문은 “총독정치의 결함은 부정할 수 없다. 개혁을 위해 무단통치를 폐지하고 식민지의회 같은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사설(4월5일)을 내보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참가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3·1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참여한 전 국민적 운동이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반도 전역을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군 3·1운동의 기세는 놀라운 것이었다. 일제에 짓밟힌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와 국민인 줄로만 알았던 한국, 한국인에게 국제사회는 감탄했다. 꼭 100년 전 자주독립국의 국민으로 살고자 한 의지를 가장 강력하지만, 전례없이 평화롭게 표현했던 3·1운동. 이방인의 눈에도 그것은 경이였다. 우리만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을 이룬 일대 사건이었음은 당시 한반도의 이방인들이 증언하는 3·1운동의 정체성이다. 

◆“가장 유연하고, 문명적인 맨손혁명”

“각기 3000명씩 무리를 나누어 외국 영사관으로 향했다. 각국 영사들이 밖으로 나와 그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 어느 모로 보나 시위는 ‘무저항적’인 것이었다.”

미국의 언론인 C W 켄달이 1919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에 담은 3·1운동의 풍경이다. 대규모 인원이 무리를 나누어 행진하고, 각국 외교관이 그들에게 인사를 보냈다는 것에서 조직적이고 평화적인 3·1운동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이방인들이 목격한 3·1운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켄달은 “그들의 계획은 ‘비폭력 혁명’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 설령 맞거나 투옥되거나 심지어 죽음을 당할지라도… 한국의 이름과 독립운동의 명예를 더립힐지도 모르는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중국의 중화신보는 “맨손혁명(徒手革命)”이라 지칭하며 “20세기의 최신식 혁명이다. … 한국민족의 이번 20세기식 맨손혁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연하고, 문명하고, 유력한 하나의 혁명이라 하겠다”(3월14일)고 평가했다. 
당시 일제는 3·1운동의 배후에 외국인 선교사가 있다고 보고 이들과 회동을 갖고, 폭력성을 주장했는데 선교사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3월24일 만남에서 일제 관리가 “한국인에게 복종을 가르치라”고 요구하자 감리교의 허버트 웰치 감독은 “한국인들의 슬로건이 ‘비폭력’이라고 알고 있다. 시위를 하는 동안 그들은 전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면박을 줬다.   
3·1운동에 참가한 기생들의 행진 모습. 여성들은 3·1운동의 한 주체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여성을 3·1운동의 주체로 주목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시위를 이끄는 여성의 존재는 비폭력성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미국 보스턴시 E W 트윙 동양부장은 “약 20명의 여학생이 대열을 이루고 아무 소리도 외치지 않으며 조용히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중국 언론의 관련 보도에서 특징 중 하나가 “어린 소학생에서 기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가담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3·1운동의 왜곡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 언론에서도 이런 내용이 보인다. ‘재팬 애드버타이저’의 3월9일자 보도는 3·1운동의 배후로 미국인 선교사들을 지목하며 “이번 소요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순진해야 할 여학생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선교사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3·1운동에 대해 일제는 야만적인 폭력으로 대응했고 참가자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달라진 국제여론, 해방의 초석이 되다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양적, 질적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일제의 지배가 ‘한국의 문명화’에 도움이 될 것이며, 독립운동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에서 크게 바뀐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한국 관련 기사량을 분석한 한 논문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단 1건에 불과했던 한국 관련 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게재돼” 3, 4월에만 25개의 기사가 실렸다. 중국 언론은 보도의 “범위가 넓고 수량이 많아 마치 한국 현지 언론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문영걸 미도중국선교연구소 소장은 지난 3월 한 학술지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3∼5월 중국 신문들은 많게는 104개(민국일보)의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고 분석했다.     

이런 보도들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지지, 한국의 역사·문화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다. 3월 이후 미국 내 한국에 대한 지지와 독립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을 보여준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6월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의 헌법 전문을 게재하거나 의회의 한국 독립 관련 논의 등을 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6월15일의 한 기사는 한국의 독립 요구를 상세히 소개하고, 일본의 불법 강점을 지적했는데 결론 부분에서 미국의 책임까지 거론한 점이 주목된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연구위원은 “(1차 대전 뒤처리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 등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의제로 설정하고, 실질적 성과를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3·1운동으로 우호적인 국제여론이 형성된 것은 분명하다”며 “이는 1943년 카이로회담(2차대전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한 회담)에서 식민지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이 독립을 보장받는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3·1운동이 동아시아민족의 각성을 일깨웠다”

중국 언론의 관심이 컸던 것은 인접국이기도 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세계 열강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고, 내부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국력이 기울어가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 언론은 3·1운동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자국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이 한국을 속국인 양 취급했던 터라 이런 접근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시보’는 5월4일 보도에서 “국민들 모두 외래 침략에 저항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은 중국이 지니지 못한 것을 한국이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며 “이것이 한국이 자유를 취득하여… 중국과 일본 사이에 떳떳하게 자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중화신보는 3·1운동의 동아시아 민족의 각성을 일깨웠음을 강조했다. 3월16일에 실린 기사에서 “이번 사건(3·1운동)과 관련하여 나는 일본 국민을 상대로 감히 한마디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아시아의 민족은 이미 각성하였다”며 “동아시아의 암흑주의를 청산하는 문제가 어찌 한 나라의 문제이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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