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기 있게 벌인 ‘정군(整軍) 운동’에 실패하고 강제로 군복을 벗어야 했다. 집에 돌아와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아내는 하염없이 우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1961년 2월15일, 서른 다섯의 그는 결심했다. 정군이 아니라 ‘혁명’을 해야 할 때라고.
그는 사흘 뒤 서울 청파동 집에서 육사 동기생들과 함께 ‘군사 혁명’을 모의한 뒤 2월19일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구 2군 부사령관 숙소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소장)을 만나 ‘혁명’을 일으키기로 손을 맞잡았다. 그는 음지에서 3개월간 기획 준비한 뒤 5.16을 일으켰다.
당시 예비령 중령이던 김종필 전 총리(JP)는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금조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로 시작하는 취지문이나 포고문 등을 작성했고 쿠데타를 반대했던 미8군 사령관 맥그루더의 설득을 시도하는 등 쿠데타의 핵심이었다. 박정희가 5.16의 지휘자였다면, 그는 쿠데타의 설계자였다. 5.16 쿠데타는 그의 정치인생 원점(原點)이었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고 공주고보와 육군사관학교(제8기)를 거쳐 육군 장교였던 김 전 총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비로소 한국 현대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원점 보지 못하면 ‘성장의 영웅주의’ 추락 우려
김 전 총리는 생전 스스로 “만년에 이르러 ‘연구십이지팔십구비’(年九十而知八十九非)라고 탄(嘆)하며 수다(數多)한 물음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하던 자”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지난 6월23일 향년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직후 사람들은 다양한 평가와 분석을 쏟아냈다. 평가는 “산업화를 일으킨 주역”(이완구 전 총리) “현대정치사의 거목”(김성원 자유한국당 대변인)이라는 호평과 “5.16 군사쿠데타의 기획자로 박정희와 함께 선거로 수립된 민주 정부를 전복한 뒤 권력을 찬탈했다”(군인권센터) 등 비판으로 확 갈린다.

그를 둘러싸고 찬반이나 호불호가 분분하지만, JP를 한국 정치 또는 한국 현대사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공과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색안경을 벗지 못하면 우리는 3김 시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양지와 음지를 함께 품지 못하는 옹졸함으로는 한발 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김기홍)는 취지에서다.
그렇다면 JP를 한국 정치 또는 한국 현대사에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가. JP를 제대로, 아니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선 그의 원점을 분명히 확인한 뒤에야 가능하다. 쿠데타를 설계해 민주적인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그 원점을 확인하지 않으면 자칫 성찰이나 반성 없는, ‘성장의 영웅주의’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운정(김 전 총리의 호)은 역사적으로 누구와 비견될 수 있을까.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 뱃심과 지략의 한명회, 개국과 우국의 율곡 이이, 이들 세 분의 장점을 고루 갖춘 분이 JP”(1권 6쪽)라는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의 평가처럼 말이다.
◆스스로 ‘혁명’으로 인식한 쿠데타는 최대 과오로
김 전 총리의 최대 역사적인 과오는 바로 그의 정치인생 원점, 즉 5.16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해 민주적인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거였다. 즉 5.16은 어떤 미사여구로 에둘러도 1년 전인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적으로 탄생한 장면 내각을 전복한 쿠데타였다.
물론 김 전 총리는 당시도 나중에도 여전히 ‘군사혁명’이라고 생각했다. 즉 “5천년의 가난을 벗어나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나라 한번 만들어보자’고 궐기한 군사혁명...”(1권 11쪽)이라며 ‘군사혁명’을 운운한 건 이를 잘 드러낸다.
하지만 김종필의 희망이나 판단과 달리 5.16은 분명 민주적인 헌정을 중단시킨 불법적인 군사쿠데타였다. 장면 내각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서있는 위치나 입장에서 다를 수 있지만, 민주적으로 부여된 정당성과 권력을 아무런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한 일군의 ‘정치군인’들이 탈취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주관적으로 ‘미래를 위한 혁명’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역사는 객관적으로 ‘또다른 과거로의 쿠데타’였다고 기록한다.
아울러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박정희 정권 탄생과 유지를 뒷받침하는 등 공포 암흑정치를 한 것도 역사적 과로 거론된다.

◆엇갈린 한일 협상 평가...“경제성장 기여” VS “식민지배 면죄부”
김 전 총리를 둘러싸고 평가가 가장 엇갈리는 부문은 역시 1962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43년 정치인생을 회고하면서 1997년 DJP 후보단일화 결단과 함께 정치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의견을 내고 있어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 전 총리는 “대일 협상은 누군가 죽을 각오로 나서 담판을 짓지 않으면 한발 짝도 나아갈 수 없는 역사의 난제였다”며 “혁명에 목숨을 걸어봤기에 나는 겁 없이 달려들었다. 이완용 같은 매국노라는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2권 275쪽)고 당시를 회고했다.
모두 “번듯한 자유민주주의를 영위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는 경제건설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2권 275쪽)과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과거사 청산 문제가 있었지만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경제성장을 이루는 게 우선이었다는 취지다.
실제 한국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 3억 달러와 차관 3억 달러 모두 6억 달러를 받아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등의 건설에 사용했다. 물론 전후 20년에 이르는 단교 상태도 마감했다.
하지만 비밀 협상으로 대규모 반대운동과 국론분열을 촉발했을 뿐만 아니라 국교 재개를 서두르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 등의 문제를 말끔히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건 잘못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김종필은 밀실에서 이뤄진 한일협약을 만들어 낸 당사자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굴욕적인 면죄부를 준 사람”(군인권센터)이라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실제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틀과 시스템, 기반을 마련되지 못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이후 일제의 강제 징용이나 징병,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놓고 끊임 없이 갈등과 긴장을 반복하고 있다. 국교 재개를 원칙적으로 풀지 않으면서 한일 관계에 구조적인 부담을 준 셈이다.
◆도와달라며 자택 찾아온 DJ에 “한 풀어드리겠다”
어둠이 짙던 1997년 10월27일 밤 8시30분, 서울 청구동 JP의 자택.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국민회의 총재, DJ)이 한광옥 부총재와 함께 찾아왔다. DJ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 전 총리를 포옹했고, 거실 소파에서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았다고 한다. JP에게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4번째 대선 도전이던 DJ는 절박했다.
김 전 총리는 소파에 앉도록 한 뒤 자신은 이번 대선에서 DJ를 도우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총재님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수모와 박해를 당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그 원과 한을 다 풀어드리겠습니다.”(2권 227쪽)
DJ는 그해 12월28일 대통령 선거에서 JP와의 연대를 통해 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여야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DJ와 2위 이회창 후보와의 표차는 40여만표. JP와의 연대가 결정적인 승인이었다.

◆DJP 연대 통해 수평적 정권교체 기여...최대 공으로
JP의 가장 큰 역사적인 공은 바로 1997년 DJP 연대를 통해 수평적 정권교체에 기여한 것일 것이다. 그 자신도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2가지 가운데 하나라고 꼽았다. JP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나 보수 진영으로부터 많은 욕을 얻어먹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DJ가 네 번째 대선 도전에도 실패했다면 호남 민심의 좌절은 역사의 한으로 증폭해 한국 사회에 그림자를 길게 남겼을 것이다. 나는 역사를 봤고 현실을 직시했다. 미래를 위해 DJ를 지지했다.”(2권 275쪽)
그는 김대중 정부가 IMF(국제통화기금) 체제 초기에 여러 어려움을 딛고 안착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한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1, 2당 주도의 대결식 한국 정치에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넘어 다양한 타협과 대화의 정치를 시도한 것에 대해 평가하는 이도 있다.
◆JP 죽음은 ‘민주주의 없는 성장주의 시대 종언’ 상징
5.16 쿠데타를 통해 한국 현대사 전면에 등장한 JP는 총리 2회(1971년 제11대, 1998년 제31대)와 국회의원 9번을 역임하며 2004년까지 44년간 한국 정치와 한국 현대사의 중심 또는 그 언저리에 자리했다. ‘영원한 2인자’로 불렸고, 3김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JP는 생전 줄곧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을 주장했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인데, 시작할 기반이 부족하고 미흡하던 그 시절 ‘경제와 민주주의’ 또는 ‘산업화와 민주화’ 가운데 경제와 산업화를 먼저 추구했던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상황이나 여건에서는 이해할 수는 있는 주장이나 논리였겠지만 성장과 분배, 성장과 공존 등을 함께 추구해야 하는 현대에는 쉽게 동의받기 어려운 논리임에 분명하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JP의 죽음은 어쩌면 한 시대, 분배나 민주주의 없는 산업화 또는 성장지상주의 시대의 종언일지도.(2018. 7. 1)
*이 글의 직접 인용 가운데 페이지가 기록된 것은 모두 [김종필 증언록 1, 2권](2016, 중앙일보)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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