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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페이지] 명나라로 떠나야 했던 조선시대 공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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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25 10:00:00 수정 : 2017-11-25 01: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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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년 태종은 ‘공녀’(貢女) 선발을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다. 명나라 사신으로부터 “공녀를 데려오라”는 황제의 명을 전달받았기 때문. 그해 11월 사신들은 최종 선발된 공녀 5명을 데리고 명나라로 돌아갔다. 조선에서 공녀의 역사는 중종 때까지 이어진다. 공식적으로 영락제와 선덕제 치하에 7차례에 걸쳐 114명의 공녀가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향했다.

임상훈 순천향대 교수는 ‘명초(明初) 조선 여인들의 명궁(明宮)에서의 삶’이라는 주제의 논문에서 조선시대 공녀의 삶을 조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명으로 건너간 공녀는 후궁이 되거나, 황제의 유희를 위해 가무나 음식 조리 등의 일을 맡았다. 임 교수는 “조선의 공녀 가운데 황제나 황족의 후궁이 된 사람은 16명이었다”며 “권현비(權賢妃)는 영락제의 큰 사랑을 받아 명나라 역사서인 명사(明史)에 조선 공녀 중 유일하게 기록이 남았다”고 설명했다. 
임상훈 순천향대 교수는 “공녀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명궁에 끌려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중국 산둥성에 있는 현비 권씨의 무덤. 임상훈 교수 제공

조선 출신 공녀 중에는 음식을 하는 집찬녀(執饌女)가 42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들은 술을 담그거나 젓갈, 두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임 교수는 “여성의 왕래를 엄격하게 제한했던 시대에 114명이라는 수는 적지 않다”며 “공녀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명궁에 끌려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강조했다.

명나라는 조선에 공녀를 요구했지만, 그러한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조선태종실록에 따르면 명은 공녀를 요구하면서도 그 존재를 감추기 위해 종이나 약재 등으로 위장하도록 지시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결과 명나라 사료에는 공녀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임 교수는 “공녀와 관련된 사료들이 주동자였던 명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명의 사신이 조선에 와서 다짜고짜 ‘잘생긴 여자를 몇 명 골라서 데려오라’는 영락제의 성지(聖旨)를 선유(宣諭)하는 기록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명이 극도로 폐쇄적인 성격을 띠는 상황에서 114명의 여인이 명으로 이주한 것은 당시로서 매우 큰 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던 공녀들은 원의 악습이었던 ‘순장’이 명 초기까지 이어지면서 황제를 따라 꽃다운 청춘을 마감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또 어려지난(魚呂之亂)으로 불리는 사건은 공녀인 여미인이 영략제의 총애를 받던 권현비를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고 잔혹한 죽음을 맞게 했다. 이 사실이 조선에까지 알려지면서 여미인의 집안을 제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여미인이 권현비를 죽게 했다는 누명은 훗날 거짓으로 드러난다.

임 교수는 “공녀로 명에 간 조선의 여인들은 명 황제의 소유물이 되어 자유롭지 못 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며 “결국에는 어려지난이나 순장으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비운의 삶을 살았다”고 전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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