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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스페셜 - 우주 이야기] (32) 엔지니어링 실패·극복의 역사…축적된 실패, 성공 기반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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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14 10:00:00 수정 : 2023-11-12 20: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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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2월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키티호크에서 2명의 남자가 비행 시험에 도전한다.

날개 길이 12m, 무게 283㎏, 그리고 12마력의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이 비행기는 첫시도에서 12초 동안 ‘겨우’ 36m를 날았다. 마지막 4번째 시험에서는 59초 동안 244m를 비행했다. 인류 최초의 유인 동력 비행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이 비행기를 ‘플라이어 1호’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바로 라이트 형제였다.

라이트 형제가 성공하기 직전 미국의 새뮤얼 랭글리도 공개 실험에 나섰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7년 동안 유인 동력비행에 필요한 엔진 개발에 몰두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2차례의 공개 실험 모두 실패로 끝난다.

라이트 형제의 성공과 랭글리의 실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은 ‘실패의 경험’이었다. 라이트 형제는 이미 1000번의 크고 작은 실험을 거친 뒤였다. 몇차례 성공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한 실험이었다. 랭글리는 그렇지 못했다.

엔지니어의 도전과 삶을 다룬 책 ‘노벨상과 수리공’에서는 라이트 형제의 성공 요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엔지니어였던 자전거 수리공인 선택한 방법은 달랐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아한 이론의 세계가 아니라 시행착오라고 할 수 있는 반복적인 테스트와 끊임없는 실패,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해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경험적 방법이었다.”

 

1903년 12월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키티호크에서 윌버, 오빌 라이트 형제가 첫 유인 동력기 비행시험에 성공하는 장면. 라이트 형제는 이 성공을 위해 1000번이 넘는 실험을 반복했다. 출처=픽사베이

◆대부분 실패한 2000번의 시험, 그리고···

 

엔지니어링의 역사는 곧 실패의 역사였다. 엔지니어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몸속에 이카로스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는 뛰어난 건축가이자 발명가였던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결국 태양열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이카로스의 날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과 도전을 상징한다. 라이트 형제는 이카로스의 날개를 꿈꿨을 것이다. 오토 릴리엔탈이라는 독일 출신의 엔지니어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새의 비행 동작을 세밀하게 연구했다.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물체를 개발하기 위해 무려 2000번 이상의 시험을 반복했다. 물론 대부분은 실패했다. 1891년 처녀비행에서 그는 25m를 날았고, 1893년에는 250m를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2000번 이상 비행 실험을 계속한 독일 출신의 엔지니어 오토 릴리엔탈. 출처=위키피디아

이로 인해 유명인사가 되었고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1896년 8월8일 화창한 여름날 시험비행 도중 글라이더가 급강하하며 추락한다. 글라이더에 탔던 릴리엔탈은 목에 심한 상처를 입고 결국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의 최고 비행거리 기록 250m를 깨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위대한 성공으로 기록된다. 엔지니어링은 실패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지만, 이처럼 실패와 성공은 동전의 양면이다. 

 

◆액체 로켓 개발하고도 조롱당한 ‘우주 로켓의 아버지’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고다드는 지금은 ‘우주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한때는 헛된 공상가로 조롱을 받았던 인물이다.

 

1919년 고다드는 우주 로켓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논문 하나를 발표한다. ‘극단 고도에 도달하는 기술’이란 제목의 이 논문에서 고다드는 로켓 비행을 통해 진공 상태인 우주로 가기 위한 수학적 이론, 고체연료 로켓 실험, 지구 대기와 대기 밖으로의 탐험 가능성을 설명했다. 그는 “엔진의 추진력을 충분히 높여준다면 로켓이 달까지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곧바로 반박과 조롱을 받는다. 뉴욕타임스(NYT)는 1920년 1월13일자에 이런 내용의 사설을 싣는다.

 

“고다드가 실제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도 모르며, 반작용을 할 수 있는 진공보다 더 좋은 뭔가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고다드가 매일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도 모르는 것 같다.”

 

사설의 요지는 “고등학생 수준 이하의 지식으로 논문을 썼다.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로켓 추진을 할 수 없어 우주 비행은 불가능하다”로 집약된다.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고다드가 직접 만든 액체 추진 로켓의 발사대를 붙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출처=미국항공우주국(NASA)

고다드는 이런 조롱과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우주 로켓이라는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논문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액체 추진 로켓 개발에 몰두한다. 1926년 3월16일 미 매사추세츠 오번에서 추운 날씨에 두툼하게 옷을 껴입은 고다드는 직접 고안한 피라미드 모양의 액체 추진 로켓 발사대의 프레임을 잡았다. 잠시 후 버너에 불을 붙였다. 액체 추진 로켓은 2.5초 동안 약 12.5m의 높이까지 날아간다. 그는 이 로켓을 ‘넬’(Nell)이라고 명명했다.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매사추세츠주는 안전을 이유로 로켓 발사 실험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린다. NYT는 이런 제목의 기사를 통해 고다드를 또 조롱한다. “달나라 로켓, 목표물에서 38만㎞ 벗어나다.” 달까지 거리에 비교해 고다드의 실험이 얼마나 큰 실패였는지 부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실험은 액체 추진제를 이용한 로켓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우주 비행의 첫발을 내디딘 인류 최초의 실험이었다. 액체추진 로켓이 ‘겨우’ 12.5m밖에 날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무려’ 12,5m나 날았던 것이다. 40여년 후 인류는 실제로 달에 발을 내딛게 된다.  

 

◆재앙과 참사로 이어진 한 엔지니어링의 실패

 

엔지니어링의 실패는 때때로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 해결했다고 자신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규명하지 못한 공학적 난제가 곳곳에 숨어 있는 탓이다.

 

붕괴 직전 출렁이는 미국 워싱턴주의 타코마 다리. 실패한 엔지니어링 역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출처=위키피디아

 

타코마 다리 붕괴 영상

 

미 워싱턴주 타코마(Tacoma Narrows Bridge) 다리의 붕괴는 공학적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타코마 다리는 1940년 7월 개통되었다. 하지만 4개월 만인 11월 붕괴했다. 개통 직후부터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현상을 보이더니 강풍이 불자 다리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출렁이는 모습이 포착된 당시 영상을 보면 어떻게 이런 다리가 만들어졌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조사 결과 타코다 다리 붕괴의 원인은 공탄성 플러터(Aeroelastic flutter) 현상 때문으로 드러났다. 고속으로 나는 비행기의 양 날개가 떨리거나 종이를 선풍기에 가져다 대면 떨리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타코마 다리는 당시로서는 첨단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현수교의 다리 부분을 얇고 가볍게 만들어 충분한 강도를 얻으면서도 비용은 아낄 수 있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강한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바람의 세기만 검토했지 바람의 진동은 고려하지 못했다. 진동 에너지가 쌓이면서 다리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초고층 빌딩을 세우고 항공모함과 고성능의 전투기까지 만들던 시절이었으나 당시 토목건축 분야에서 공기역학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아주 작은 밸브 하나가 엄청난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1978년 3월28일 새벽 미 펜실베이니아주 스라미일섬의 원자력발전소 2호기에서 사고가 일어난다. 냉각수에 사용하는 필터를 청소하던 중 필터와 연결된 펌프가 고장 나면서 냉각수 순환이 멈췄다. 이어 냉각 계통의 압력을 조절하는 밸브가 닫히지 않으면서 냉각수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결국 핵연료봉이 노출되어 녹는 노심 융해 상황까지 치닫는다. 원전처럼 그렇게 큰 구조물도 작은 밸브의 작동에 이상이 생기면서 작동을 멈추고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1986년 1월28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캐너배럴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우주 왕복선 ‘챌린지호’의 폭발 당시 장면. 우주개발 도전 역사의 대표적인 참사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미국항공우주국(NASA)

 

 

 

 

‘챌린지호’ 폭발 사고 영상

 

특히 하늘과 우주를 향한 도전사에서 실패는 너무 흔해 ‘항공우주 개발의 역사=실패의 역사’라는 등식이 자연스러울 정도다. 1986년 1월28일 우주 왕복선(Space shuttle) ‘챌린지호’의 폭발 사고는 지금까지 인류의 우주 도전사에서 가장 큰 참사로 기록되어 있다. 수개월간의 조사 끝에 원인이 밝혀진다. 무리하게 발사를 강행한 인적 요소도 있었지만, 폭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추력을 얻기 위해 사용한 고체추진 로켓의 고무링(O-ring)이었다. 기계적·공학적으로 설계되고 수차례 시험을 거쳐 완성된 우주선이었지만, 고무링 하나로 발사 70여초 만에 폭발하는 비운을 겪게 된 것이다.

 

하늘을 날기 위한 도전에도 크고 작은 실패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초대형 비행선 힌덴부르크의 폭발 사고가 대표적인 사례다. 1936년 3월 첫 비행에 성공한 힌덴부르크는 당시 나치 독일이 엔지니어링의 자부심으로 내세운 상징적인 비행선이었다. 길이만 무려 245m에 달했다. 하지만 힌덴부르크호는 1937년 5월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연료로 쓰던 수소 가스가 폭발하면서 승객 97명 중 36명이 숨지는 참사로 이어지고 비행선에 의한 수송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주개발은 엔지니어링 총집합···첫발사 성공률 27%

 

우주개발 강국들은 이처럼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통해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한국의 첫 우주 발사체인 ‘나로호’(KSLV-I)가 겪었던 발사 실패를 그들은 수없이 경험했다. 실제 위성 발사에 도전했던 나라의 첫 성공률은 27%에 불과하다.

 

우주개발 기술은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 모든 과학기술과 엔지니어링의 총집합이라는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수치이다.

 

지난 2014년 국제 우주정거장으로 보급품을 싣고 향하던 ‘안테레스’ 로켓의 폭발 장면. 출처=픽사베이

실패와 사고의 원인도 다양하다. 액체 엔진과 고체 모터, 추력기, 동력장치, 연소실 등 추진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원인으로 가장 많이 꼽히지만, 페어링(위성을 보호하는 덮개) 분리 등의 문제와 더불어 항공 전자공학, 구조, 전기 장비, 기상환경 및 통신 등 거의 모든 부위와 단계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사방이 지뢰로 둘러싸인 곳을 헤쳐가는 것과 같다.

 

1957년 미국 최초의 위성 발사체였던 ‘뱅가드’가 발사 2초 만에 폭발했다. 탱크와 인젝터(연료 분사 노즐)의 낮은 압력 때문에 연소실의 고온 가스가 연료 시스템으로 들어간 게 원인이었다. 또 미국의 로켓 ‘아틀라스G는’ 발사 49초 후 벼락에 맞아 비정상 기동 후 지상명령으로 파괴되었다.

 

1966년 일본의 첫 우주 발사체인 ‘람다’는 발사체 제어에 문제가 생기면서 궤도 진입에 실패한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합작 개발한 로켓 ’유로파’는 11차례 발사 시도 중 무려 7번이나 실패했다. 러시아의 ‘소유스‘ 로켓도 2002년 연료 펌프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서 발사 29초 만에 폭발했다. 2014년 10월 국제 우주정거장의 물품 보급을 담당하는 상업용 ‘안타레스’ 로켓도 발사 6초 만에 폭발한다.

 

1957년 미국 최초의 위성 발사체였던 ‘뱅가드’가 발사 2초 만에 폭발하는 장면. 출처=미국항공우주국(NASA)

◆언론·비전문가의 비난···그래도 반드시 가야할 길

 

1969년 7월17일 NYT는 ‘A Correction’(정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49년 전 로버트 고다드를 조롱했던 사설에 대한 사과의 내용을 담았다. 다음은 정정기사의 한 대목이다. “계속된 조사와 실험은 17세기 아이작 뉴턴의 연구 성과를 확인해 주었다. 이제는 대기에서처럼 진공상태에서도 로켓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NYT는 당시의 잘못을 사과한다.”

 

NYT가 정정기사를 실은 1969년 7월17일은 인류 최초의 유인 달 탐사선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날이었다. 고다드의 논문과 12.3m의 실험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날이기도 했다. 또 NYT가 조롱했던 것처럼 목표물에서 38만㎞나 벗어난 게 아니라 그곳을 향해 12m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게 된 계기이다.

 

NYT의 정정기사는 고다드 개인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인류의 우주 개발과 도전 과정에서 구슬땀을 흘린 모든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비록 미미해 보일지라도 첫걸음이 있었기에 위대한 도전과 성과가 가능하다는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반성이기도 했다.

 

오늘날 역시 여전히 많은 비난과 조롱에도 우주를 향한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꿈꾸고 상상했던 일이 언젠가 희망과 현실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고다드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불가능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꿈은 오늘의 희망이며, 내일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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