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에 해당되는 영어 communication의 어원이 ‘나누다’는 뜻의 라틴어 communicare에 있다. 신이 자신의 힘을 사람에게 나누고, 열이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해지며 소통이 이뤄진다. 소통은 신과 인간, 물체와 물체 사이에 나눠 가져서 내 것으로만 독점하지 않는 과정이다. 이로부터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사실과 정보를 공유해 상호 이해가 원활하게 일어나는 맥락으로 확장돼 쓰이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은 우위의 사람이 상대적으로 열위의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이 소통은 시간을 나눈다는 점에서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지만 만남의 기회를 갖는다는 제한된 맥락으로만 쓰인다. 간혹 정치와 노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주장이 대립할 때 양측이 만나서 사진 찍고 현안을 타결하는 소통을 한다. 이러한 자리는 일회적인 소통에 불과할 뿐 상시적인 소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현안이 없더라도 부담 없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겨우 만나 해결의 물꼬를 열게 된다. 이러한 소통은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쉽게 만나 의견을 주고받는 상호 이해를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소통이 특정한 날짜와 사안에만 진행되는 깜짝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통이 시혜의 특성을 갖다 보니 사람이 대등한 자격에서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토론 문화가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된다.
회남자 ‘주술훈’에도 고대의 제왕이 소통에 적극적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요임금은 간언을 할 수 있는 감간고(敢諫鼓)를 설치해 정부의 잘못이 있으면 북을 치게 했고, 비방목(誹謗木)을 세워 잘잘못을 쓰게 했다. 이 이야기는 훗날에 등장하는 신문고와 대자보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간고와 비방목의 설치는 고통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의 원망을 들으려는 소통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열의를 보인 것이다. 감간고와 비방목의 설치는 위기 상황에서 이해 당사자가 만나는 우리의 소통 방식과 닮아 있다. 이처럼 기존의 문화적 연원이 깊다 보니 소통을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시혜성 소통에서 북이 울리지 않고 사진 찍지 않는 일상의 소통으로 바뀐다면 ‘불통’의 리더십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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