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스물’은 삶을 깊이 있게 응시하면서 관계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민영화사 제공 |
박흥식 감독의 신작 ‘두 번째 스물’은 중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중년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죽음을 생각한다. 비로소 인생이 보인다. 마침내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동감’의 폭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나간다.

민하(이태란)는 ‘잘 나가는’ 안과의사다.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에 대해 줄줄이 꿰고, 포도의 품종을 설명해가며 와인을 음미할 만큼 삶이 여유로운 마흔의 여자다. 민구(김승우)는 마흔여덟의 영화감독이다. 두 아이를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이기도 한 그는 국제영화제 단편부문 심사위원을 맡아 이탈리아를 찾았다. 20대 중반에 불같은 사랑을 나누다 헤어진 두 사람은 13년이 흐른 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우연히 만나 다시 옛감정의 불씨를 살린다.

두 번째 스물은 여자 나이 마흔 살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주인공들은 나이 40세를 이르는 ‘불혹’(不惑)조차도 ‘불타는 유혹’의 줄임말이라 풀이한다.
하지만 첫 번째 스물(20)과 두 번째 스물(40)의 사랑을 비교해보면 설령 ‘온도’ 차이는 없다 하더라도 ‘표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스물 때도 뜨겁게 사랑을 나누어보지만 첫 번째 스물 때의 사랑과는 ‘다름’을 느낀다. 낭만이 깔린 바다 앞에서 다시 돌아온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식이다.
이탈리아의 북부 대도시 토리노부터 전원도시 만토바까지 현지에서 90%가량 찍었다. 카메라를 따라가는 이탈리아 여행은 보너스다.

두 남녀는 여행하는 동안 문화예술을 주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특히 카라바조의 그림을 찾아 이탈리아 곳곳의 미술관을 돌아보며 그의 작품 세계와 삶, 죽음, 구원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제멋대로인 성격과 천부적인 재능, 선술집에서의 폭음과 싸움, 많은 빚과 음침한 친구들, 반복된 투옥, 살인, 수년간의 도주생활, 그리고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빼곡하게 갖춘 ‘회화의 반항아’다.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그의 회화 양식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티가 났지만, 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참신하고 강력하며 대담한 자연주의 화풍으로 채워,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인문학적 지식을 갖추면 더 재미있게, 감독이 숨겨놓은 상징과 은유, 의미들을 하나씩 발견해가며 더 많은 것을 풀어 볼 수 있는 영화다.
길을 걷거나 화랑에서 그림을 대할 때는 예술적 지식과 감성을 자랑하던 이들이지만 호텔로 돌아오면 달라진다.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은 물론 ‘과거에 누가 먼저 상대를 찼는가’를 놓고 13년 전 결별의 순간을 복기하며 티격태격한다.

“우리는 결혼을 생각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 거야. 많은 것을 가진 너와 결혼 하기란 그때의 내겐 너무 버거웠거든.”(민구)
“넌 내가 아무 때나 뛰어들 수 있는 바다였어. ··· 내가 꺼지라고 소리쳤어도 넌 거기 있어야 했어. 네가 먼저 날 찬 거야.”(민하)
실제 연인의 모습을 보는 듯, 두 배우의 물오른 연기가 몰입을 돕는다. 이태란 특유의 똑 부러진 이미지는 오히려 멜로 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매력으로 작용한다. 김승우는 중년 남성을 그야말로 차분하게 그려낸다. 책을 볼 때 안경을 올리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실제 노안에서 터득한 연기일 듯싶다.
박 감독은 “1999년 단편으로 토리노영화제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데, 그때 토리노 영상위원회 측이 이탈리아에서 영화를 찍는다면 도와주겠다고 해서 이탈리아를 무대로 시나리오를 썼고, 그러다 보니 주인공 직업도 영화감독으로 설정했다”고 귀띔한다.

영화 속 중년의 사랑은 20대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20대 때보다 적극적이다. 옛 사랑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하고 헤어진 사이라면 재회가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것은 아니다. 이문세가 부른 ‘옛사랑’의 노랫말처럼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놔두자고도 한다.
영화는 대충 보면 불륜 아닌가 싶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른이 된’ 사랑을 그려낸다. 옛 사랑은 꼭 스쳐간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그동안 일상에 쫓기느라 접어두었던 사랑을 펼쳐보며, 다시 사랑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다시 사랑을 시작해야 할 때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