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사회 실상 되돌아봐

이를테면 박만길(24·남)에게서는 부모가 어떻게 애를 써서 키가 큰 녀석을 낳게 됐는지, 공부를 잘하여 기대를 한몸에 받던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유머러스하게 소개해 나간다. 박만길이 지서 쪽에서 걸어오는 순경이 담뱃불을 빌리려 하자 그 사내에게는 불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창졸간에 죽어가는 자의 시선으로 마지막을 기록하는 스타일이다.
손영희(22·여)는 궁지우체국 전화교환원. 이 여성은 자신의 마지막을 김경욱의 손을 빌려 이렇게 기록한다.
“다시 폭죽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손영희는 목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목에서 뭔가가 쿨럭쿨럭 쏟아졌다. 책상 위에 떨어진 것은 피였다.”
황순경의 동거녀 손미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전보처럼 찾아오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죽음 또한 그러했다”고 작가의 손을 빌려 썼다.
죽은 사람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손백기(59·남)는 면장까지 거친 동네의 소문난 인기남이었다. 이 사람은 팔촌 형네 냄새 나는 뒷간에서 사흘째 태업 중인 대장과 씨름하다가 총소리를 들었다. 끝까지 냄새에 질식할 각오를 하고 뒷간에 숨어 있다가 살아났다. 살인자가 마을을 휘젓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관료적 절차만 따지던 당시 상황이 작금의 한국 사회 실상과 얼마나 다른지 돌아보게 한다.
김경욱은 “진실의 몸통을 포획하기 위해 사실성의 씨줄에 개연성의 날줄을 엮었다”면서 “장기 미제 사건에 덤벼든 프로파일러처럼, 하지만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과(어긋난 욕망, 그릇된 신념, 권위주의적 분위기, 진실과 거리가 먼 공적 언어, 억압적 이데올로기, 작동되지 않은 시스템…)의 거미줄에 매달려 있던 것은 결국 비명에 간 사람의 마지막 모습들이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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