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리는 정부에 당국의 외압 논란 확산
기촉법 개정안 "채권단 자율성 높여 vs 관치 폐해 커질 것"
[편집자 주] 글로벌 경기침체와 양적 완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로 지목받고 있는 기업구조조정은 오히려 역주행하고 있다. 기업구조조정의 과정이 매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돈을 쏟아붓고도 다시 부실화되는 기업이 나온다. 수차례 워크아웃 (기업재무구조개선)에도 불구하고 정상화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특히 ‘성완종리스트’로 대변되는 외압 논란은 한계에 봉착한 구조조정의 단면을 보여줬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심화하는 글로벌 경쟁과 급변하는 산업 재편 속에 수많은 부실기업이 발생해 국가의 부담을 키워나갈 것이 분명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세계파이낸스는 시리즈를 통해 기업구조조정 문제를 해부한다.
그동안 기업구조조정이 원활하지 못한 데에는 정부의 정책적 실패, 금융당국의 외압, 채권단의 역할 한계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동안 전체 시스템에 무리 없이 조용히 넘어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정책적 판단이 오히려 이 같은 구조조정의 난맥상을 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 채권자, 정부간 권한과 책임을 다시 조율하고 그 구조조정 과정을 명확히 해야 하는 부분이 중요한 상황이다. 채권자와 채무자 간 워크아웃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도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업구조조정 기능 '삐걱'
기업구조조정은 자원이 효율적 재배분을 통해 부실기업의 경쟁력을 되살리고 국가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기업은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해 계속 기업으로서 재생할 수 있고, 채권자는 대출 기업의 조기 정상화를 통해 자산 건전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매끄럽게 이뤄지면 국가 경제 전반의 성장 동력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부실기업으로 낙인찍힌 기업들은 단기 유동성 확보만을 위해 무리한 경영활동을 이어가기 일쑤다. 채권은행의 경영개선 요구를 무시하면서 기업정상화보다 지분, 경영권 유지에만 관심을 두는 경우가 태반이다.
은행 중심의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는 것이 우리나라 기업 구조조정 과정의 핵심이지만 그 기반은 점점 취약해지고 있다. 저금리가 장기화하고 직접금융이 발달하면서 부실징후 기업도 장기간 연명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계열사를 이용해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발행해 단기 유동성을 조달하면 간단하게 자금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수은행이 차지하는 기업금융 비중이 지난 2009년 37.6%에서 지난 2013년 40.4%로 늘어난 것을 보더라도 채권은행들이 기업 구조조정보다는 기업 살리기에 급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설, 조선, 해운업 등 국책은행 여신비율이 높은 기업이 부실화하면 국가 전체에 폭탄으로 돌아온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남기업 워크아웃 과정 '의혹 덩어리'
경남기업 사태는 현 기업구조조정 방식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경우다. 2차 워크아웃 조기졸업 특혜에 더해 3차 워크아웃 과정에서는 이례적으로 대주주의 무상감자 없는 출자전환이 이뤄졌다.
우선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경남기업은 지난 2009년 1월, 3년 일정으로 워크아웃에 돌입했지만 1년 앞당겨 졸업했다"고 지적했다. 경남기업의 부채비율은 2차 워크아웃 직전인 2008년 249.9%에서 2010년 256.6%으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총이익도 1538억원에서 1158억원으로 줄었다. 게다가 경남기업이 워크아웃을 조기졸업한 뒤에도 채권단이 경남기업 유동성 악화를 이유로 채무 상환기일을 2년 6개월 연장한 점도 문제삼았다.
2013년 10월 개시한 3차 워크아웃에서 무상감자 없는 출자전환이 이뤄진 점도 의혹을 키운다.
당시 실사를 담당한 회계법인은 경남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서는 경남기업의 대주주인 성완종 전 회장(새누리당 의원, 정무위원회 소속)의 지분을 2.3대 1 비율로 무상감자해 출자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이 이를 무시하고 채권단에 자금지원을 지시했다는 게 검찰의 의견이다.
경남기업의 기부금이 워크아웃을 전후한 시기에 크게 늘어난 점도 의혹이다. 경남기업은 1차 워크아웃에 돌입하기 1년 전인 2008년, 54억원을 후원금 명목으로 기부했다. 이는 당해 당기순이익의 42%나 된다. 또 1차 워크아웃을 졸업하기 직전 1년 전인 2011년 25억 4000만원을 기부했다. 베트남 하노이에 '랜드마크 72'를 준공한 것도 같은 해다. 하지만 경남기업은 3차례 워크아웃에도 불구, 지난 달 상장폐지됐다.
◆칼 못 빼드는 정부
솎아낼 기업을 제대로 솎아내지 못하면 거시경제 및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이 훼손된다. 개별 기업의 수익성 악화는 경기 침체 장기화와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결과지만, 제대로 된 기업구조조정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 점에도 기인한다.
기업구조조정은 기본적으로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영역이다. 하지만 양자 간 문제를 풀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산업정책적 측면을 감안, 정부의 개입이 일정 부분 용인된다. 특히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그렇다. 다만 정치,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급력이 워낙 큰 탓에 정부는 선뜻 퇴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 중인 성동조선해양의 경우, 통영시는 수출입은행, 우리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채권단의 추가 자금지원이 없으면 2만 4000여명의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업계 빅3' 이외 조선사 중 20만t급 이하 중대형 상선을 스스로 건조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중견업체를 날리기도 쉽지 않다. 금융권에선 2011년 터진 저축은행 사태의 경우, 2000년대 후반 미리 손봤어야 하지만 대통령 선거 등을 감안, 제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비용을 키운 측면이 강하다. 결론적으로 기업의 ‘대마불사전략’에 정부가 말려들고 있는 셈이다.
◆금융당국 역할, '조정' 넘어 '외압' 논란
금융당국의 간여가 어느 선까지 이뤄져야 하는지도 늘 논란을 빚는 대목이다. '세밀한 조정자'의 역할을 넘어 은행 등 채권단에 특정 기업을 지원하라고 압박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이다.
최근 뜨거운 감자인 경남기업 사태에서는 워크아웃 승인 전 회계법인의 실사결과 대주주의 감자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음에도, 1000억여원의 자금을 경남기업에 지원하도록 은행에 외압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현재 검찰은 지난 2013년 경남기업의 3차 워크아웃 당시 금감원 간부가 신한은행 등 채권단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이다. 과거 금융당국에서 업계구조조정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기업 퇴출결정 관련) 요즘 너무 세게 하는 거 아냐"는 말을 당시 상사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이는 당국의 기관장이나 간부급이 일상적으로 구조조정 실무부서에 직접 개입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촉법 개정안, 기대와 한계
이런 가운데 지난 11일 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이 발의한 기촉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관심을 모은다. 금융감독원의 기업구조조정 개입시 채권단 절반(채권액 기준) 이상의 동의를 받도록 한 내용을 담았는데, 이는 채권단의 자율성을 높이려는 의도다. 그간 금융당국이 워크아웃 과정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하며 문제를 키웠기 때문이다.
반면, 금감원의 역할이 명문화되면서 폐해가 커질 거라는 주장을 비롯해 '암묵적인' 개입 가능성은 여전할 거라는 얘기도 나온다. 구조조정 개입 기준을 절반이 아닌 현행법의 의결동의 기준(75%)으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과거 '정부와 당국→채권단'→기업'으로 이어졌던 구조조정의 과정이 지난 10년 사이 '채권단→기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는 만큼 채권단에 제대로 힘을 실어주고 매우 중요한 사안만 당국이 공식적으로 간여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오현승 기자 hsoh@segye.com
<세계파이낸스>세계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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