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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의 ‘돈’ 이야기…탐욕의 역사]로마 원로원의 ‘화폐 부정’

입력 : 2015-04-20 14:47:32 수정 : 2015-04-20 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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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발행에 드는 금은 빼돌려…은화 은 함유율 5%로 급락
동화를 폐지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이런 도적놈들! 나라 밖이 아니라 나라 안에 더 큰 도적들이 있었구나!”

로마 제국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치솟는 화를 금치 못했다. 황제 앞에 선 비서관들은 우락부락한 체구를 지닌 군인 황제의 분노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서기 270년에 제위에 오른 그는 동시대 역사가들로부터 “오랜만에 로마인의 혼을 지닌 황제가 나타났다”는 격찬을 들을 만큼 유능한 지도자였다.

당시 로마는 매년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북방 야만족, 즉 게르만족의 침략과 약탈 때문에 서민 경제가 박살이 난 상태였다. 270년에도 수십만을 헤아리는 반달족이 도나우 강을 건너 침략해왔는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들을 짧은 시간 사이에 격파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

우선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메타우로 강변에서 반달족을 크게 무찔렀으며, 이어 북부의 파비아에서 남은 무리들을 깨끗하게 소탕했다. 도나우 강 너머로 돌아갈 수 있었던 반달족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정도로 대승이었다.

해가 가기도 전에 야만족 문제를 해결한 황제는 수도 로마로 개선한다. 그런데 270년에서 271년에 걸친 겨울을 수도에서 보내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해야 할 황제가 왜 이렇게까지 격분한 걸까?

◆‘화폐 부정’ 발각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군인 출신이지만, 단순히 전장의 용사가 아니라 군대의 살림, 즉 경영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그가 오랜만에 돌아온 수도의 내정을 보살피던 중 심각한 ‘화폐 부정’을 발견한 것이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야만족 침입과 내부의 반란이 거듭되면서 본국 외에 갈리아 제국 및 팔미라 왕국으로 삼분된 상태였다. 지폐가 없던 과거의 주요 화폐는 금화, 은화, 동화다. 로마의 주요 화폐는 아우레우스 금화와 데나리우스 은화 및 세스테르티우스 동화였으며, 본래 리옹에서 금화와 은화를, 수도 로마에서 동화를 각각 주조했다.

그러나 갈리아 제국 성립으로 리옹을 비롯한 갈리아 지방이 떨어져 나간 이후로는 동화뿐 아니라 금화와 은화도 로마에서 주조하게 됐다. 문제는 화폐 주조소를 관리하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화폐에 들어가는 금은을 몰래 빼돌리면서 발생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빼돌렸지만, “비리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이놈저놈 끼어들면서 부정행위는 갈수록 심해졌다. 이들의 부정축재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금화의 중량이 기존의 6.5g에서 6g 이하로 내려가고, 은화에 들어가는 은 함유율은 겨우 5%로 급락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은화라기보다 은도금화라고 해야 옳을 수준이다.

고대의 화폐는 현대의 지폐처럼 정부의 보증과 신용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 그 자체가 지니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곧 화폐의 가치가 된다. 즉, 금화에 함유된 금의 가치, 은화에 함유된 은의 가치로 화폐의 가치가 결정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타 재화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은화의 은 함유율이 줄어들면, 해당 은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고대는 인플레이션이 매우 드문 시기라 물가가 약간만 상승해도 큰 혼란이 일곤 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의 부정은 안 그래도 ‘야만족 침입’ 때문에 힘들던 로마 경제를 더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들 ‘법과 권력으로 훔치는 도적’들을 나라 밖의 도적보다 더 증오스럽게 받아들인 것도 당연했다.

◆피로 얼룩진 비리 수사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황제 등극 이전 군사령관 시절부터 군대 내 비리 뿌리 뽑기에 열과 성을 다할 만큼 부정부패와 비리를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국가 재정을 좀먹는 ‘흰 개미’들을 그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황제는 즉시 화폐 주조소 및 관련자들에 대한 엄격한 조사에 돌입했다. 그러자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조 기술자들과 일꾼들은 “억울하다”며 파업을 선언했다. 원로원 의원들도 “제국이 삼분되면서 국세 수입이 줄어든 것이 은 함유율 하락의 주요 원인이지, 부정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면서 이들을 두둔했다.

하지만 황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기술자와 일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아벤티노 언덕으로 군대를 급파했다. 황제의 특명을 받은 군대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7000명이나 되는 기술자와 일꾼들이 살해됐으며, 로마 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 황제의 조사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사해도 ‘몸통’까지는 드러났지만, 금은을 빼돌린 진짜 ‘머리’, 원로원 의원들은 잡을 수가 없었다.

“증거가 없습니다, 폐하. 다들 보복을 두려워해서인지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비서관들의 보고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를 갈았다. 벌써 271년 봄이 다가오고 있다. 할 일이 태산처럼 많은지라 부정부패 수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직접 처벌하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언제나 칼에 손을 대고 있는 아우렐리아누스”라고 불릴 만큼 피아에 모두 엄격한 그는 도저히 원로원 의원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동화 발행 중지

271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한 칙령을 선포했다.

“아우레우스 금화의 중량은 6.5g으로 환원하고,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유율은 공식적으로 5%로 정한다. 또한 이 경우 은 함유율이 너무 낮아 은화와 동화의 가치 차이가 거의 없으므로 세스테르티우스 동화는 폐지한다”는 내용이었다.

행정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이 칙령이 사실 정치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로마는 처음부터 제국으로 시작한 나라가 아니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옮겨간 국가였다. 공화정 시기 나라를 다스린 중추는 원로원이었다.

때문에 제정 후에도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금화와 은화는 황제의 이름으로, 동화는 원로원의 이름으로 발행됐다. 동화에 새겨지는 ‘S’와 ‘C’라는 단어는 ‘Senatus Consulto’, 즉 ‘원로원 발행’이라는 뜻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 동화의 발행을 중지해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최고의 영예를 없애버린 것이었다. 현대로 따지면,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을 폐지한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당연히 원로원 의원들은 울화통을 터뜨렸지만,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비리가 없었다”는 원로원 의원들의 주장을 역이용해 내민, “은 함유율을 5%로 낮춰야 할 만큼 국세 수입이 감소했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은 도금화와 동화는 사실상 가치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는 그의 동화 폐지 근거에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의 원망을 깨끗이 무시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짧은 사이에 팔미라 왕국을 정벌하고, 갈리아 제국을 병합해 로마 제국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다. 덕분에 제국은 이후 수백 년간 통일된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의 공적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황제를 미워하는 원로원조차 ‘Restitutor Orbis(제국을 회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바칠 정도였다.

그러나 지나친 엄격함이 오히려 해가 된 걸까? 전쟁터에서는 무적이었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어처구니없게도 죄를 지은 뒤 처벌을 두려워한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서기 275년 4월 사망. 만으로 채 5년도 안 되는 짧은 재위였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세계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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