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필자의 어머니는 “위압적인 군인들로 인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시절에 비하면 2차 대전 후의 일본은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모른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주권이 일왕에게 있었으며, 언론사상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현저히 낮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점령 최고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법적으로 여성은 남성과 평등해져 참정권을 얻게 됐고, 민주주의가 곳곳에 뿌리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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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가사키 선문대 교수·국제정치학 |
맥아더의 이처럼 관대한 정책은 그가 딱히 일본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많은 부하를 잃었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성서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한 것이다. 결국 맥아더의 통치는 잇단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 국민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했다.
트루먼의 해임으로 맥아더가 약 7년에 걸친 일본통치를 끝내고 귀국할 때 아사히신문은 다음과 같이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일본 국민이 패전이라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사태에 직면해 허탈감에 젖어 있을 때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미덕을 가르쳐 주고 일본 국민이 밝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사람이 맥아더다. 어린아이의 커 가는 모습을 기뻐하듯 어제까지 적이었던 일본의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을 기뻐하며 격려해 준 사람도 맥아더였다.”
맥아더가 재임했던 기간 50만여 통의 편지가 그에게 전달됐다. 일부 비판적인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감사의 편지였다. 맥아더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은 아침 6시였음에도 20만 인파가 자발적으로 길가에 나와 그를 배웅했다. ‘좋은 점령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정설이다. 하지만 맥아더에 의한 일본 점령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적국인 일본에 대해 징벌적 점령을 한 것이 아니라 적을 사랑하고 관용의 정신으로 일본의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맥아더는 좌익으로부터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우익으로부터는 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헌법9조’를 강요한 장본인으로 비난받았다. 이제 일본은 패전 70년을 맞아 원점으로 되돌아가 일본 번영의 초석을 다져준 맥아더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야가사키 선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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