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현상들을 그러모아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데 쓰이는 말 중에는 역사책에서 빠져 나온 것들이 많다. 후세 사람들이 일반적인 단어로 쓰곤 하는 그 말들은 그 역사를 알면 뜻이 더 또렷해진다. 인류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듬은 역사의 의의를 은연중(隱然中)에 실감하는 것이겠다. 거꾸로 뜻밖에 역사의 아이러니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테러와 전쟁 등 세상사가 점점 더 시끄러워지면서 거의 일상적인 단어의 축에 끼게 된 반달리즘에 관한 생각 몇 갈래다. 다음은 국어사전의 내용이다.
“반달리즘(vandalism) : 1. 반달 족의 기질이나 풍습 2. 문화나 예술을 파괴하려는 경향. 서기 455년경 유럽의 민족 대이동 때 반달 족이 로마를 점령하여 광포한 약탈과 파괴 행위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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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미국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에 대한 항공기 납치 테러인 9·11 사건은 인류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이런 테러리즘부터 길거리 낙서까지의 다양한 해코지를 대충 ‘반달리즘’이라고 부른다. 반달족이 왜 그 이름으로 인류역사에 남아야 할까? 세계일보 자료사진 |
“미국 미시간 주 사우스필드의 한인사회 소유지에 또 하나의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됐다. 한인들은 일본 사회의 반발과 이에 따른 반달리즘(파괴행위) 등을 내심 우려하고 있다.”(세계일보, 8월 18일)
“이 (영국의) 청소년 갱은 성인 범죄자 못지않은 폭력성으로 주민들을 긴장시켰다. 이들의 공격 대상은 해외 유학생, 이민자들이었다. 이들은 인종차별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반달리즘적 폭력 행위를 자행했다.”(서울신문, 10월 19일)
“문화재나 예술품, 공공장소에 낙서를 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반달리즘’이라고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의 반달리즘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혐의로 체포되는 미국 청소년은 한해 10만7000명이 넘습니다.”(SBS, 11월 9일)
이 단어는 이유 없이, 또는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문화유산이나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폭력행위를 이르는 뜻으로 쓰인다. 때때로 낙서나 쓰레기 투기(投棄), 테러와 같은 짓거리까지도 그 범위에 든다. 품이 꽤 큰 단어다.
중부 유럽 지역의 게르만족(族)이 4∼6세기에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땅을 찾아 남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유럽 역사의 ‘민족 대이동’의 중요한 내용이다. 반달족(Vandals)은 게르만 족의 여러 갈래 중의 하나다. 그 갈래 중에는 고트족(Goths)도 있다.
고트족이 세상에 끼친 흔적이 고딕(gothic)이다. 이는 ‘고트족의’ 또는 ‘고트풍(風)’이라는 뜻으로, 교양 없고 야만스럽고 촌스럽다는 뜻이었다. 반달족과 함께 고트족의 성품과 기질을 경멸하는 의미였다. 당시 지중해의 강자(强者) 로마제국의 눈에 비친 ‘촌뜨기’들의 모습이었으리라. 처음에는 그랬다.
건축과 미술 등 세계 예술 사조(思潮)의 중요 항목인 고딕 양식(樣式)의 그 고딕이다. 푸대접 받던 같은 처지의 두 촌뜨기 문화, 하나는 테러리즘과도 짝할 문화 파괴의 상징이 되었고 또 하나는 노트르담 대성당(프랑스 파리)으로 대표되는 이름 고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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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방화로 모두 타버린 국보 1호 숭례문 앞을 경찰이 지키고 있다. 정부와 사회를 향한 불만이 문화재 훼손으로 이어진 이 어이없는 사건을 놓고 언론은 예외없이 ‘반달리즘’이란 용어를 썼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영웅 안중근 장군이 침략주의자 일본의 이등박문을 총살한 것을 기려 중국은 하얼빈역에 안중근 기념관을 냈다. 일본정부는 “어찌 ‘범죄자’를 기념할 수 있느냐?”는 성명을 냈다. 정치적 반응일 수도 있으나, 그들이 지닌 인식의 솔직한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역사 모르는 나라인 일본의 시민들 상당수도 ‘음흉한 안중근이 위대한 영웅을 암살했다’고 안다.
몽고와 함께 자기나라(일본)를 침략하고, 자기네 위인을 암살한 흉악한 나라 한국에서 어찌 ‘욘사마’와 같은 좋은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궁금하다고 진지하게 질문한다. 도쿄의 중학교 수학교사였다. 일본에서 몸소 겪은 일이다. 반달리즘과 ‘음흉한 안중근’을 견주어 본다. 역사에서 짓뭉개진 겨레[족(族)]에게는 응당 그런 ‘대접’이 제격인가?
반달족의 역사는 나름 화려했다. 유럽 서남부와 아프리카 북부를 무대로 강력한 함대를 구축해 지중해를 장악한다. 끝내 로마를 점령한다. 그 과정에서의 파괴와 약탈은 ‘일등국가’ 로마의 입장에서는 처절한 상처였을 것이다. 어찌 잊으랴? 반달리즘은 복수의 증오를 품은 말로 점차 인류 역사에 일반화된 것이다. 534년 로마 군대는 반달족을 없앴다.
반달족도 로마의 ‘문화의 힘’을 부러워하고 본받으려는 정책을 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했다. 이에 비해 고트족은 비교적(반달 족과 비교해) 일찍 당시 세상의 주류 지배구조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취향이나 미(美)의식이 새로운 흐름으로 주목을 받게 됐다. ‘고딕 양식’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문화 파괴자’의 오명 ‘반달리즘’은 인류 역사의 정의(正義)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강자가 덮어씌운 역사의 ‘누명’들은 과연 정당한가? 곰곰 생각할 일이다.
강상헌 평론가·우리글진흥원장 kangshbada@naver.com
■ 사족(蛇足)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등이 고딕 양식 건축의 대표작들이다. 뾰족한 아치와 첨탑(尖塔), 신비로운 스테인드글라스, 다양한 세부 묘사와 성스러운 분위기의 많은 조각작품 등이 특징이다.
활자체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딕체(體)는 뜻밖에 그 고딕 양식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섬세한 세부 묘사로 장식미를 추구한 고딕 양식과 달리 활자체(폰트)의 고딕체는 ‘묵직하면서 굽은 곳이 없고 꾸밈이 없는 획의 글꼴’이다. 이미지가 크게 다른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딕체로 불리는 이런 활자가 서양 타이포그래피의 산세리프체와 비슷하다고 한다. ‘산(sans)’은 프랑스어로 ‘없는’[영어의 ‘without’과 같음]의 뜻, 세리프(serif)는 H나 I자 글자 기둥의 위아래에 붙은 부분이다. 산세리프 같은 모양을 고딕체라고 잘못 알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양 활자문화가 아시아에 도입될 때 고딕체라는 이름이 잘못 붙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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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족과 함께 처음에는 ‘촌뜨기’ 문화로 푸대접을 받아야 했던 고트족의 취향인 고딕(gothic)은 ‘고딕 양식’의 씨앗이 되었다. 고딕의 대표적 건축물인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세계일보 자료사진 |
활자체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딕체(體)는 뜻밖에 그 고딕 양식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섬세한 세부 묘사로 장식미를 추구한 고딕 양식과 달리 활자체(폰트)의 고딕체는 ‘묵직하면서 굽은 곳이 없고 꾸밈이 없는 획의 글꼴’이다. 이미지가 크게 다른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딕체로 불리는 이런 활자가 서양 타이포그래피의 산세리프체와 비슷하다고 한다. ‘산(sans)’은 프랑스어로 ‘없는’[영어의 ‘without’과 같음]의 뜻, 세리프(serif)는 H나 I자 글자 기둥의 위아래에 붙은 부분이다. 산세리프 같은 모양을 고딕체라고 잘못 알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양 활자문화가 아시아에 도입될 때 고딕체라는 이름이 잘못 붙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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