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에서 출항한 사흘의 바닷길은 은성했다. 몬순의 아열대 바람 속에 파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바다 물결에 누가 순은(純銀)의 진정제라도 뿌린 듯 바다는 점잔을 뺐다. 한바다호 김종성 선장의 얘기로는 계절적 영향과 항해자들의 행운이라고 했다. 그렇게 실크로드 탐사대는 사흘 만에 중국 광저우에서 베트남 다낭에 기항했다. 항만시설의 사정으로 작은 배로 갈아타고 다낭 부두에 접안할 수 있었다. 부둣가의 시멘트 틈새에 서린 자줏빛 갯메꽃이 제일 먼저 반겼다.
다낭 부두에 닿으면서 보니 다낭 해안을 둘러싼 작은 산들과 언덕이 예사롭지 않다. 커다랗고 하얀 해수관음보살상과 그 위 언덕에 선 교회의 대형 십자가가 한데 눈에 들어왔다.
중국 광저우 황푸고항 먀오터우촌의 해신 축융(祝融)을 모신 남해신묘 사당이 떠올랐다. 뱃사람과 항해자들에게 무사안녕은 일상이지만 늘 절실하고 종요로운 것이다.
문헌상의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지금보다 항해 사정이 열악한 점을 감안하면 혜초 스님도 그 옛날 점성(占城) 땅 베트남 중부 해안에 들었을 것이다. 반가운 제비 떼가 뱃전을 날았다.
베트남은 예전 대월(大越)과 대남(大南)으로 나뉘어 불렸는데 이를 한데 통칭하며 월남(越南)으로 불렸다 한다. 우리에게 1960∼70년대 월남전의 흔적은 해양 휴양도시인 다낭에서는 언뜻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베트남은 몰라보게 변신을 꾀하는 중이었다. 불경에 등장하는 각종 용어들을 주해한 책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왕오천축국전 항목에 ‘각멸(閣蔑)’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지금의 베트남 중남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또 다른 지명인 참파나, 이걸 음역(音譯)한 점파[占城]도 해당 지역에 거의 동일하게 겹친다. 또 임읍(林邑)이라는 지명도 있다. 이걸로 미루어보면 결락본(缺落本) 왕오천축국전의 혜초 스님의 항로 기항지에는 베트남 중남부 해안 지역이 유력하다. 만일 다낭이나 호이안 지역에 닿으셨다면 어디를 답사하고 누구를 만나셨을까. 오행산 산기슭에 자리한 영응사(靈應寺)와 그 뒤편 거대 현동굴(玄洞窟)에 부처를 모시고 좌선하셨을까. 실전(失傳)하는 부분에 대한 행적은 다낭 주변의 문화유적을 발로 찾고 마음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다.
다낭시 한 강(Han river) 옆에 있는 짬 조각박물관엔 주로 짬 조각상(cham sculpture)들이 전시돼 있다. 마치 인도 힌두 석조유물을 방불케 한다. 고대 참파왕조(王朝)의 1200여년의 종교적 분위기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코끼리 머리의 비누슈 신상과 시바 신상(神像)은 신과 인간, 신과 동물의 교합이라는 진경이 돌에 도드라져 있다. 다낭에서 40여㎞ 남서쪽에 왕과 일체화된 자바신을 모신 참파왕조의 성지인 미선 유적지가 있다. 여러 조각들만큼이나 많은 신(神)들의 역할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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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여년 동안 베트남을 지배했던 참파왕조의 유적에서 나온 불교와 힌두교 조각들이 전시돼 있는 짬 박물관. |
호이안의 내원교(來遠橋)의 밤 풍경은 주변의 색색깔 등불에 어울려 화려하고 농염하고 안온하다. 13세기 이후의 밤풍경이 그대로 지금 21세기의 밤 풍정에 밴 듯하다. 여러 나라에서 온 무역상과 이방인들이 낯선 말들을 섞으며 서로의 의중과 물색(物色)을 살폈을 것이다. 1593년 호이안의 일본인들이 만든 내원교는 그래서 일본교(日本校)로도 불린다. 지붕이 궁륭처럼 덮인 다리 입구의 좌우 양편에 원숭이상과 개상이 앉아 있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다. 다리의 양단을 지키는 이 견원지간(犬猿之間)은 어쩌면 이방인들의 문물과 종교가 서로 격조하지 않고 너나들이하는 지경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풍흥고가(風興古家)가 있는 이 상점거리는 하나같이 풍성하고 원만한 외피를 두른 등(燈)들을 내걸었다. 왠지 밤하늘로 깊이 떠올라 지상에 살 수 없는 비련(悲戀)을 숨길 것만 같다.
그 상점 지붕 위에서 흘러내리듯 늘어진 부겐빌레아 진분홍 꽃이 난분분하다. 이 호이안의 흥성했던 시절보다는 앞서지만 혜초가 이 거리에서 인간적인 연정을 느끼며 걸었을 순간을 떠올린다. 강가의 밤거리에는 종이 접시에 촛불을 담아 팔려는 아이들이 서슴없이 다가든다. 촛불이 담겨진 아이들의 맑고 까만 눈빛이 예쁘다. 밤의 강물에 촛불 접시를 띄우면 왠지 가슴에 어떤 비원이 서릴 것만 같다.
각기 다른 언어들은 14세기 이 무역항 거리에 술렁거리며 흘렀고 지금도 여전히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이 그때처럼 밤거리를 흘러다니며 정다이 말을 섞는다.
무엇보다 다낭시에서 버스로 4시간여 거리의 후에는 응우옌 왕조의 황도로 오롯하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응우옌 왕조의 황궁이었던 후에성(城)은 부분적인 파괴와 복원의 한가운데서도 여전한 규모와 고풍스러운 위용을 갖추고 있다. 그 입구 안쪽에 대형 베트남 깃발이 붉게 휘날린다. 포르투갈에 이은 프랑스의 식민지화로 막을 내린 이 왕조의 성 안을 한 바퀴 도는 데 족히 한나절은 걸린다. 황궁의 태화전(太和展) 안쪽 후원의 처마엔 새장을 매달아 두었다. 머리깃털이 뿔처럼 솟은 새는 황궁의 적막을 달래는 새뜻한 음률로 얼마나 사랑을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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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시에서 10여㎞ 떨어진 곳에 있는 오행산 정상에 다낭시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망강대(望江臺) 전경.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혜초는 바닷가 이름 없는 뱃사람의 무덤을 보았을지도 있다. 베트남 외곽을 버스로 지나다 보면 시골마을 주변에서 시멘트로 만들어진 서민들의 무덤을 자주 보게 된다. 화려함의 극치인 카이딘 황제의 무덤과 버려지듯 겨우 윤곽만 남은 장삼이사들의 무덤들은 죽음 앞에 두동지지 않는다. 요란스럽지 않은 서민의 공동묘지는 화려하지만 외로워 보이는 카이딘의 황릉과는 달리 죽어서도 이웃처럼 모여 산다. 어느 묘지 입구에 멈춰 있는 불도저는 뭔가 이채로움을 띤다. 황제의 무덤은 수백 년이 지나 관광의 대상이 되고 서민의 무덤은 무심히 지나쳐진다. 이 당연하면서도 어딘가 소슬한 느낌 속에 혜초의 죽음, 그 열반(涅槃)이 건너다보인다. 죽음의 거처와 깨달음의 거처가 서로 다른가. 다르지 않다면 그곳은 어디인가.
다낭시에서 10㎞ 떨어진 오행산은 일명 마블마운틴(marble moutain)으로 불리는 대리석 산이다. 정상의 망강대(望江臺)는 강만을 내려다보지 않고 지상에 서린 모든 길들을 새삼 조망하게 한다. 그 모든 길들은 지상의 그리고 바다라는 큰 손바닥의 손금만 같다. 그것은 자라나는 손금이다. 주변 기념품 상점엔 대리석으로 만든 성모상과 불상과 힌두의 사자상 등이 한데 어울려 있다. 하나의 돌 속에 여러 믿음의 상징들이 다정스레 갈려나온 듯하다.
다낭을 떠날 무렵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 평범한 서민들이 치르는 7일장(日葬)에 관한 거였다. 어느 날 다낭 바닷가로 밀려온 고래나 고래새끼를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친견하고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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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의 풍흥고가(風興古家)는 밤이면 갖가지 화려한 등불로 흥청거리고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사진작가 정철환 제공 |
다낭 부두 한편에 있는 해신 사당에 잠시 참배하고 항구를 떠났다. 주검으로 떠밀려온 고래를 이레 동안이나 장례를 치러주는 바닷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불성(佛性)은 갈마들어 있어 보였다. 혜초는 바닷가에 떠밀려온 죽은 고래를 위한 긴 장례행렬을 보았을까. 기행이란 깨달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깨달음을 보는 여정이 아닐까. 그 착한 바닷가 사람들의 마음엔 이미 용연향(龍涎香)이 배었는지도 모른다.
글·사진=유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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