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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공공씨 후손이 원수 피해 ‘공’자에 ‘수’자 붙여 홍씨 탄생

관련이슈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입력 : 2014-07-15 21:17:29 수정 : 2014-07-15 21: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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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5>홍(洪)씨, 남양홍씨(南陽洪氏) 1편 ◆ 홍씨(洪氏)는

홍씨가 처음 생긴 곳은 중국이다. 감숙성 서북부에 있는 돈황(敦煌)이 홍씨가 탄생한 지역이다. 처음 홍씨가 탄생한 것은 돈황 지역에 살고 있는 공공씨(共工氏·요순시대 형벌을 다루는 관리)의 후손이 원수의 추격을 피해 ‘공’(共)자에다 ‘수’(水)자를 붙여 홍(洪)이라는 성씨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홍씨가 생겨난 것은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해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下)가 고구려에 입국한 것에서 연유한다. 고구려에 들어온 홍천하가 연개소문이 일으킨 반란에 반대하며 다시 신라로 건너가 삼국통일 이후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홍씨가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남양사 모선문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 있는 남양홍씨 당홍계 시조 홍은열을 모신 사당. 원래 홍은열의 묘와 사당은 북한에 있지만, 남북분단으로 참배를 하지 못해 충북 청원군에 새로 지었다.
남양홍씨(당홍계)의 시조인 홍은열(洪殷悅)은 도시조 홍천하의 10세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은열의 초명은 홍유(洪儒)이고 자는 술(術)인데, 고려 4대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이다. 즉, 이름이 홍유였는데 왕건이 은나라의 명재상이었던 주열의 이름을 따서 ‘은열’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남양홍씨(토홍계)의 시조는 홍선행(洪先幸)이다. 그는 당성(남양의 옛 지명)에서 제법 세력이 있었던 선비 집안의 후손인데,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이 남양홍씨 토홍계를 이루고 있다.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남양홍씨 당홍계의 시조인 홍은열의 후손이라는 주장(당홍계)도 있으나, 홍선행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토홍계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현재 남양홍씨의 인구는 약 41만명이다. 그중 당홍계가 38만명, 토홍계가 3만명으로 추산된다.그 외 홍씨의 본관은 문헌에 111본까지 나와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남양(南陽), 풍산(豊山), 부계(缶溪), 홍주(洪州) 등 4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풍산홍씨는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홍지경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한 후 풍산(豊山)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풍산홍씨 인구는 3만5000여명이다.

부계홍씨의 시조는 홍좌(洪佐)이다. 홍좌의 선조는 홍은열의 손자이며, 문하시중을 역임한 홍난(洪蘭)으로 전한다. 그 후 누대에 걸쳐 부계에 거주하면서 분관이 된 성씨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홍난 이후 세계가 어떻게 전해졌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그 후손들이 고려 후기 때 직장(直長)과 동정(同正)을 지낸 홍좌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양홍씨(당홍계)와 합본하였다고 한다.

홍주홍씨의 시조는 홍규(洪規)다. 홍규는 왕건이 견훤을 칠 때 공을 세워 ‘삼한상중대광 벽상익찬공신’(三韓三中大匡 壁上翊贊功臣)으로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해풍(海豊·홍주의 옛 지명)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남양홍씨(당홍)는

남양홍씨는 조선시대에 네 번째로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해 10대 명문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남양홍씨에는 같은 본관을 쓰는 두 계통이 있는데, 당홍과 토홍이 그것이다. 당홍은 당나라에서 건너온 중국계를 의미하고, 토홍은 토착 호족 계통을 뜻한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남양홍씨 중 당홍은 11만7638가구 총 37만9708명이 국내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남양홍씨 당홍의 시조는 홍천하다. 그는 고구려 영류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문화사절로 건너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활동을 펼치다가 연개소문의 난 때 신라로 피신하였다. 선덕여왕 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삼국통일 후 신문왕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후대로 어떻게 전해졌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당홍은 홍은열의 13대손에서 13파로 갈리고, 그 외에 3파가 있어 모두 16파로 나뉘어졌다. 그중 후손이 가장 많은 파가 남양군파(南陽君派, 파조 홍주·洪澍), 문정공파(文正公派, 파조 홍언박·洪彦博),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파조 홍언수·洪彦修), 익산군파(益山君派, 파조 홍운수·洪云遂), 예사공파(禮史公派, 파조 홍복·洪復), 중랑공파(中郞公派, 파조 홍후·洪厚) 등이다.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익산군파(15%)다.

남양홍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329명(당홍 206명, 토홍 12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884명), 안동권씨(359명), 파평윤씨(336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것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순위는 더 올라간다. 그중 당홍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8명, 문형 2명을 비롯해 왕비 1명(헌종의 계비), 청백리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명을 배출하였다.

홍성민 3부자 묘역 맨 위가 영의정을 지낸 홍성민이고, 두번째가 그의 아들이자 가평군수인 홍서익의 묘이고, 맨 아래가 평안도 관찰사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 홍명고의 묘이다.
◆ 남양홍씨(당홍)의 연혁과 인물

남양홍씨 당홍계는 고구려 때 당나라에서 건너온 홍천하를 도시조로 하고, 홍천하의 10세손인 홍은열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손자대에서 재신공파(宰臣公派)가 나뉘어지고, 증손대에서 다시 예사공파(禮史公派)가 나뉘어진다. 그 후 6세손에서 중랑장파(中郞將派)가 나뉘어지고, 13세에서 13개 파로 나뉘어졌다. 이들 중 홍주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와 홍언박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가 특히 번창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시조 홍은열을 비롯해 그의 6세손이자 이자겸의 난에 충절을 지키다 척준경에게 살해된 홍관(洪灌), 홍관의 손자이며 성불도감판관을 지낸 홍원중(洪源中), 홍원중의 아들이며 추밀원사와 공부상서를 역임한 홍사윤(洪斯胤), 홍사윤의 장남이자 동지추밀원사와 형부상서를 역임한 홍진(洪縉), 홍사윤의 차남이며 동지밀직사사를 역임한 홍예(洪裔), 홍진의 아들이면서 송종례와 함께 임유무를 주살하여 무신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홍규(洪奎), 충렬왕 때 세 번이나 시중 자리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문정공파 파조이면서 공민왕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유명하다.

이들 가운데 홍규는 남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그의 두 딸은 충선왕의 비인 순화원비와 충숙왕의 비이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다. 아들은 삼사좌사를 역임한 홍융(洪戎)이고 손자는 남양군파의 파조인 홍주, 문정공파 파조이면서 도첨의우정승을 지낸 홍언박, 감찰대부를 역임한 홍언유(洪彦猷), 검교참찬문하부사를 역임한 홍언수(洪彦修)다. 또 사촌형이 홍자번(홍예의 아들)이다.

홍자번의 장남 홍경(洪敬)은 도첨의찬성사와 상호군을 역임했고, 차남 홍순(洪順)은 도첨의평리를 역임했고, 홍경의 장남 홍승서(洪承緖)는 우대언을 역임했고, 차남 홍승연(洪承演)은 선공부령을 역임했다. 또 남양군파 파조 홍주의 아들 홍징(洪徵)은 벼슬이 판밀직사사에 이르고 당산군에 추봉되었으나, 염흥방이 처형될 때 그의 매부라는 이유로 아들 홍상빈과 함께 처형되었다. 홍언박의 장남 홍사보(洪師普)는 판각문사를, 차남 홍사범(洪師範)은 지밀직사사를, 3남 홍사우(洪師禹)는 전라도 도순문사를, 4남 홍사원(洪師援)은 전서를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공신인 홍길민(洪吉旼·호조판서)과 아들 홍여방(洪汝方·이조판서)이 유명하다. 특히 세조의 반정에 공을 세운 홍윤성(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 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홍달손은 좌의정, 홍순손은 판서를 역임하였다.

허균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된 홍길동도 남양홍씨 당홍계로 알려져 있다. 홍길동의 아버지인 홍상직(洪尙直)은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홍상직의 아들이자 홍길동의 형인 홍일동(洪逸童)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또 홍일동의 측실 딸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淑儀) 남양홍씨다.

전남 장성의 홍길동 생가 허균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된 홍길동은 세종조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남양홍씨 홍상직의 서자로 파악되고 있다. 이조판서 홍상직은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홍귀동, 둘째가 홍일동, 셋째가 서자인 홍길동이다. 홍길동의 조카이자 홍일동의 딸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 홍씨다.
익산군파인 홍응(洪應)은 좌의정에 올랐고, 동생 홍흥(洪興)은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홍경주(洪景舟)는 중종반정에 참여한 후 병조판서와 좌참찬을 역임했고, 홍순언(洪淳彦)은 종계변무사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다녀왔다. 또 홍희남(洪喜男)은 임진왜란 후 여섯 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며 종전 협상을 매듭지었고, 명나라에도 두 차례 파견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대제학과 영의정에 오른 홍서봉(洪瑞鳳)은 아버지 홍천민(洪天民), 숙부 홍성민(洪聖民), 할아버지 홍춘경(洪春卿)과 함께 3대4호당의 영예를 누렸다. 또 홍천민과 홍성민의 후예는 6대에 걸쳐 7명이 대과의 영예를 누렸으며, 그중 영의정이 3명(홍명하·홍치중·홍순목), 우의정이 1명(홍중보) 배출되었다. 홍주(洪澍)의 7대손인 홍춘경(洪春卿)의 자손에서만 상신 5명, 문형 2명, 왕비 1명을 비롯해 20여명의 판서급 인물을 배출한 것이다.

홍춘경은 홍천민(洪天民·율정공파), 홍일민(洪逸民·연기공파), 홍성민(洪聖民·졸옹공파)의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인 율정공파(栗亭公派)에서는 홍천민의 아들 홍서봉(洪瑞鳳)이 인조 때 삼정승을 두루 거쳤고, 증손 홍처량(洪處亮)이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둘째인 연기공파(燕岐公派)에서는 홍일민의 손자 홍명원(洪命元)이 인조 때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홍처후(洪處厚)의 자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경종 때 노론(老論)의 선봉으로 소론(少論)과 맞섰던 홍계적(洪啓迪)은 홍처후의 증손이다.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홍계희(洪啓禧)는 홍처후의 아우인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이다. 셋째인 졸옹공파에서는 대제학 홍성민의 손자 홍명하(洪命夏)가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그밖에 홍치중(洪致中)이 영조 때, 홍순목(洪淳穆)이 고종 때 각각 영의정을 역임하는 등 4명의 정승을 배출하였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피력한 홍서봉과는 달리 승문원부제조였던 홍명형(洪命亨)은 강화에 피신했다가 청군이 쳐들어오자 불을 붙이고 화약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또 홍명구(洪命耉)는 평안도 관찰사로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또 청백리인 홍기섭(洪耆燮)은 도둑이 들었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고 돈 꾸러미를 놓고 갔는데, 다음날 “돈 잃은 사람 찾아가라”는 방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명심보감’에 실려 있다. 홍기섭의 아들이자 어영대장이었던 홍재룡(洪在龍)의 딸은 헌종의 계비로 왕비가 되었고 아들 홍종석(洪鐘奭), 손자 홍순형(洪淳馨)은 부자 예조판서를 지냈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누리던 남양홍씨 당홍도 부침은 있었다. 이조판서를 지내고 봉조하가 된 홍계희(洪啓禧)의 아들 5형제가 대과에 올라 위세를 떨쳤는데 그중 홍지해(洪趾海·형조판서), 홍술해(洪述海·이의), 홍찬해(洪纘海·승지), 그리고 홍지해의 아들 홍상간(洪相簡) 등이 벽파에 가담했다가 정조 1년 홍인한(洪麟漢)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해 한동안 쇠운의 길을 걸었다.

홍범도 장군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최고의 전승을 올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이끈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그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갔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신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뒤 조국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세상을 떠났다.
홍경래와 관군의 전투 그린 순무영진도 홍경래의 난은 무너지는 조선조 봉건제도에서 차별없는 사회를 추구했던 민란의 서막이었다.
또 홍경래(洪景來)는 평안도에서 농민반란을 주도해 나라를 큰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혁명을 꿈꾸던 그는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기인·장사·술사 등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부자들을 포섭해 군자금을 내도록 했다. 순조 11년 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2월에 병력 2000명으로 스스로를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일컬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 후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주 태천 철산 용천 등 평안북도 일대를 휩쓸고, 관군과 안주에서 싸웠으나 패주하였다. 정주성에 웅거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홍경래의 난은 서북도 차별에 반대하여 일어났으나, 그 후 조선의 봉건지배에 항거하는 농민반란으로 이어졌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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