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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일단 청문회까지는 가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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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6-16 21:23:01 수정 : 2014-06-17 13: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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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는 전 공직자를 표상하는 얼굴
신상털기보다 역사인식 계기돼야
문창극씨의 국무총리 후보 지명이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흔들고 있다. 가뜩이나 ‘세월호 참사사태’에 이은 ‘유병언 도피 소동’으로 온 나라가 비탄과 자조와 분노로 들끓는 중에 터진 일이라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이 다짐하고 있는 국가개조 과업이 결정적으로 동력을 잃을까 우려의 소리도 높다.

목정균 언론인·전 수원대교수
도대체 ‘문창극’의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 난리들인가. 요 며칠 사이 온갖 언론매체들이 그가 이전에 행한 갖가지 발언들(강연), 문장들(칼럼), 강의들(대학강단)을 이잡듯 샅샅이 들춰내고, 현미경 들이대듯 까발려서 이제는 거의 남아날 게 없을 지경이다. 이 같은 ‘문창극 사상사냥’ 과정에서 포획된 사냥꾼들 나름의 최대 성과(사냥물)는 무엇보다 그의 언동에 ‘친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점인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일본 누리꾼들에게서조차 ‘보기 드문 훌륭한 인물’이라는 극찬이 나왔겠느냐는 실로 입맛 쓴 논평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다.

특히 문 후보가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 2011년에 ‘하나님의 뜻’을 빌려 행한 강연 중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너희들은 이조(李朝) 500년을 허송한 민족이다. 너희는 시련이 필요하다”고 했다는 발언이야말로 무심코 허투로 넘길 ‘언표(言表)’가 아니다. 이른바 ‘문창극의 역사인식’과 세계관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관점이 이 한마디에 다 숨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이조’다. 우리의 민족사 반만년, 국가사 약 3000년래에 이조라는 나라가 이 땅에 존재한 일은 없다. 있다면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전주(全州) 이씨(李氏)의 사유 집단일 뿐, 나라도 아니라고 모욕하기 위해서 “이씨조선”, 곧 ‘이조’라는 해괴한 이름을 지어 붙였다. 남의 나라 국호를 저희들 입맛대로 고쳐버린 것이다. 언뜻 듣기엔 ‘이조’란 조선에 대한 이칭(異稱) 같지만 실은 조선을 능멸하기 위한 비칭(卑稱)이요 멸칭(蔑稱)인 것이다. 그들의 안중에는 우리 한민족이 애초부터 대등한 상대로 들어 온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야말로 단순한 ‘식민사관’을 넘어 한민족의 존재 자체를 완전 도외시(度外視)하려는 ‘무인(無人)사관’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니 일본은 조선을 단순한 약탈대상, 식민지 착취대상으로만 삼은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씨를 말려 이 지구상에서 영구히 절멸(絶滅)시키겠다는 악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출발한 것이다. 이 땅을 계엄통치(헌병경찰제) 하에 두고 철저하게 민족말살정책을 편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말 우리글을 빼앗고 그 조상마저 완전 부정ㆍ멸살시키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한 것이 이를 극명하게 말해 준다.

따라서 아무런 성찰 없이 조선을 ‘이조’, 또는 ‘리조’로 쓰고 말한다면 이는 곧 자기의 역사를 전면 부정하는 ‘자학사관’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런 간단한 논리를 문 후보와 같은 언론계의 거물급 원로인사가 모르고 썼겠는가는 의문이다.

물론 문후보가 조선을 ‘이조’로 부른 것이 단순한 실수일 수는 있다. 문 후보 연배들의 초중등 과정만 해도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잔재를 후련히 청산하지 못한 시기였다. 그러니 부지불식간에 그 중독 증세를 드러내는 경우는 지금도 주변에서 흔히 목도되는 현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어지는 “이조 500년을 허송한 민족”이라는 문맥은 그 같은 단순 실수의 개연성(蓋然性)을 완전 봉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솔직히 나는 500년을 허송했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독해가 안 된다. 한 나라가 500년을 허송했다고 한다면 그 기나긴 세월동안 아무 짓도 한 게 없다는 뜻이 되는데 과연 그런가?! 사실 나는 문 후보의 이 같은 역사인식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단지 언론인으로서 ‘사인(私人) 문창극’이 하는 말이라면 무슨 소리를 한들 대수인가. 문제는 그가 이 나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고, 또 그 자신 스스로 적격자라고 판단하여 이 제의를 수락하였을 터이니 논란의 발단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인류사상 한 왕조가 500년 이상을 존속한 경우는 극히 드문 예에 속한다. 중국에도 없는 일로 나는 알고 있다. 소위 ‘중원’ 천지에 명멸했던 역대왕조의 평균 존속연한이 고작 70년 정도라 하지 않는가. 조선조 500년의 역사가 자랑은 될 수 있을지언정 타매(唾罵)되어야 할 수치의 역사로 지탄 받을 일인가. 이를 ‘허송’으로 타기(唾棄)하려는 역사인식이야 말로 사실 망발에 속한다.

한마디로 조선은 문민(文民)의 전통을 확립한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붓 한 자루에 의존하여 500년의 국맥을 이어온 자랑스러운 문명국가라는 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 건국의 설계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으로 능히 뒷받침된다. 삼봉은 인간이 항상 지키고 나아가야 할 바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 곧 오상(五常)을 서울 도성 안에 새겨 놓음으로써 조선이 지향해야 할 이상과 포부를 만천하에 선언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 바로 오상, 그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은 동대문을 흥인문(興仁門)으로,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으로,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으로, 북문을 홍지문(弘智門 : 일명 肅靜門·숙정문)으로, 그리고 문 안 중앙에 종각을 세워 보신각(普信閣)이라 명명했다. 인류사상 그 어느 왕조가 이처럼 확고한 도덕적 정당성과 논리적 일관성에 기초하여 나라를 이끌어 나가겠다는 건국이념을 정립하고 출발한 일이 있는가. 조선조 500년은 그 건국이상과 자존의지의 실현을 향한 분투의 역사였다. 무엇보다 블랙홀과도 같은 중국의 그 거대한 흡인력에 빨려들어가지 않고 자기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지키며 끝내 살아남은 승리의 역사, 눈부신 항쟁의 역사였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성웅 이순신의 거북선 건조, 실학파의 과학적 진보정신, 그리고 성자(聖者)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민족의 정신적·지적 자산은 모두가 ‘오상’에 기초한 조선의 건국이념과 문민의 전통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빛나는 조상의 나라 조선조 500년을 감히 ‘허송’ 이란 극언으로 폄훼하다니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YS정부의 첫 국무총리를 지낸 황인성 선생은 취임직후 중앙일간지 편집국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총리의 위상을 한 마디로 행정부 공무원만이 아니라 전 공직자를 표상하는 얼굴이라고 했다. 총리라는 직임을 이보다 더 간명하고도 엄중하게 풀이한 정의도 없다고 본다.

조선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오늘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과 그 동료들인 좌우 양 의정의 주요직무를 ‘음양조리(陰陽調理)로 규정하고 있다. 시쳇말로 해석하면 좌우 대립의 갈등을 조화로운 합일로 이끌어 나가는 역량을 기대한다는 뜻이 된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국무총리에게 주문하고 요구하는 책임총리의 역할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새 총리는 고도의 전문적인 식견은 물론 고매한 인격을 갖춘 덕인(德人)이어야 한다. 여기에 산악 같은 장중한 위엄을 갖춘 인물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문 후보가 과연 그런 인물인가는 두고 볼 일이다.

야당은 벌써부터 중도낙마를 벼르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여당 내에서도 엇박자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총리인사 검증은 일단 청문회까지는 갔으면 한다. 고식적 ‘신상털기’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차제에 전 국민을 상대로 격조 높은 한국사 이해의 대학습 마당을 청문회 장에서 펼쳤으면 한다. 여기에 걸맞도록 여야 의원들의 수준 높은 역사인식과 한국 근현대사 이해의 깊은 공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목정균 언론인·전 수원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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