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나리오를 읽은 지 5분 만이었다. 평소 작품 선택에 신중을 기하기로 유명한 배두나(35)가 ‘도희야’(감독 정주리)에 출연하기로 한 건.
그런데 이 영화, ‘제6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며 배두나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보였다. 소식을 들은 배두나가 기쁜 나머지 집 안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녔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왜 이 영화를 선택했느냐고 물으신다면…. 그 이유를 만들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어떤 작품을 하던 간에 이유보다는 끌림이 더 강해요. ‘도희야’는 시나리오가 무척 좋았고, 특히 ‘문체’가 눈에 들어왔어요. 소설책도 첫 장만 보면 ‘내가 이 소설에 반할까, 안 반할까’ 어느 정도 눈치를 채게 되잖아요. 이 작품도 그랬어요. 궁금했어요. 글에 여백도 많고 무척 맘에 들었죠.”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도가 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배두나는 그런 점에서 ‘도희야’에 푹 빠져 있는 듯했다. 2009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은 경험이 있지만, 이번에는 한국영화로 칸을 찾았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컸다.
“5년 전에는 제가 선택받아서 칸에 간 느낌이라면, 이번에는 제가 선택해서 간 기분이랄까. 좋은 선택이었고, 어쨌거나 칭찬을 받은 것 같아 뿌듯하고 기쁘고 감사했어요.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를 알아보는 외국인이 참 많다는 걸 느껴요. 유럽에만 가도 저를 ‘복수는 나의 것’(감독 박찬욱)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게 한국문화의 힘이고, 한국영화의 훌륭한 인적자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죠.”
‘도희야’는 한 섬마을에 새로 부임해온 파출소장 영남(배두나 분)이 의붓아버지 용하(송새벽 분)와 할머니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 도희(김새론 분)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그린다. 섬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여러 사건들이 엉키고 충돌하면서 인물간의 미묘한 관계와 정체성이 드러나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제가 맡은 영남 캐릭터보다는 도희(김새론 분)가 더 좋았고 끌렸어요. 요즘 남자 캐릭터 영화들이 많은데, 이런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와서 좋았고 저도 이 작품 안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가 중간에 없어지지 않고 끝까지 세상에 나와서 빛을 봤으면 했죠.”
제목은 ‘도희야’지만, 스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건 영남이다. 영화는 영남의 눈에서 바라본 도희, 마을 사람들, 세상을 통해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 잉태하는 비극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다보니 부담감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주연보다는 조연 체질인지도 모르겠다”며 웃는 그녀.
저예산 영화인 탓에 짧은 시간에 모든 장면을 찍어야 하는 어려움도 따랐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대작을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스태프들의 고생을 덜게 해줄 정도의 윤택한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사실 배두나는 이번 영화에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스태프들이 고생하는 걸 지켜보면서 맘이 많이 아팠어요. 저예산이라고 각오는 하고 갔지만, 현장에서의 느낌은 또 다르니까. 하루에 너무 많은 작업을 하다 보니, 피곤해서 최상의 연기를 못 끌어내는 순간이 오면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고생한 만큼 좋은 작품으로 보상받은 것 같아 저나 스태프나 감독님 모두 기뻐하고 있어요.”
이제 30대 중반 나이에 접어든 배두나. 얼마 전 칸 영화제에서의 호평과 짐 스터게스와의 열애를 고백해 화제선상에 올랐지만, 배우 배두나의 근간을 이루는 건 뭣보다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라는 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다음 선택은 무엇일지 궁금해지는 가운데, 오는 7월 할리우드 진출 두 번째 작품인 ‘주피터 어센딩’(감독 라나&앤디 워쇼스키)도 국내 개봉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배두나, 그의 진짜 전성기는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김경호 기자 still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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