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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지자체 홍보마당 된 백서… 제작·활용 확 바꿔라

관련이슈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입력 : 2014-04-25 20:22:52 수정 : 2014-04-25 23: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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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개선 목소리 높아 ‘우리 모두 새롭게 시작합시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후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국정감사장에 내걸린 현수막 문구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그 후 21년이 지나 발생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000여 달러에서 3만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20년 전 재난백서에 등장하는 내용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판박이처럼 재연됐다. 

①제작 주체를 바꾸자

세계일보가 지난 20년간 제작된 백서를 점검한 결과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의 홍보성 내용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대형 재난마다 정부는 사고 예방의 미흡, 사고 발생 원인, 수습과정의 문제가 지적되면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지만 백서는 딴판이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성수대교붕괴 사고 백서에는 “이날 오후 7시에는 사고 책임을 물어 이원종 시장이 경질됐고, 서울시 최초로 기술직 출신의 우명규 시장이 부임해 의욕적으로 사고수습에 임했으나 제반 사정으로 10여일 만에 경질됐으며, 11월 3일 최병렬 시장이 부임해 사고수습을 마무리하는 등 순식간에 영욕이 교차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정작 교훈이 될 만한 책임자들의 잘잘못은 없고 그들의 ‘우여곡절’만 적혀 있는 셈이다.

전북도가 발간한 ‘서해훼리호 사고 백서’에도 ‘하나로 뭉친 도민의지’, ‘기민한 초동조치’, ‘애향의 물결’ 등으로 내용을 나눠 전북도를 홍보하는 내용이 주다. 반면 ‘사고 발생의 반성’ 부분은 전체 210쪽 중 1쪽에 불과하다. 가장 최근 만들어진 천안함 백서도 마찬가지다. 천안함 침몰 사고 당시 제기된 갖가지 의혹은 정부의 폐쇄적 소통 탓이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백서의 ‘국민과의 소통 노력’ 장엔 48쪽에 걸쳐 정부의 대국민 홍보 내역만 서술돼 있다.

②제작 과정을 바꾸자

정부나 지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만들다 보니 제작과정에서 검증이 안 된다는 문제도 생긴다. 재난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명시된 재난관리법에도 정작 사고 수습 후 언제까지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작 기준이나 별도의 백서 제작 위원회 같은 제3자를 통한 검증 의무 등 백서의 ‘질’을 높일 보완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검증이 없는 백서는 전문적, 객관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이 때문에 공무원들은 참사가 반복될 때마다 공무원들이 백서를 참고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으면 “백서는 그냥 참고하는 자료일 뿐”이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실제 백서를 들여다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문화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행정편의주의로 만든 뒤 당사자나 제3자 검증이 없이 그대로 노출되다보니 개인정보 노출 등 제2, 제3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높다. 실제 온라인상에서 볼 수 있는 성수대교붕괴 사고 백서엔 사망자의 이름, 직업, 나이, 보상받은 금액과 부상자의 이름, 주소, 주민번호 등 주요 개인정보가 그대로 보였다.

③활용 방안을 세우자

‘재난백서의 종착지는 정부나 지자체의 캐비닛’이라는 말이 있다. 잘 만들어진 재난백서는 재난 예방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지만 부실백서가 양산되는 탓에 활용이 안 되는 현실을 일컫는 말이다.

‘서해훼리호’ 사고 백서를 제작한 전북도가 당시 1000권을 전국 지자체와 관련 부처에 전달했지만 정작 제작 당사자인 전북도는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서해훼리호’ 백서를 요구하는 외부 문의에 직접 국가기록원 포털사이트에서 다시 파일을 구했다. 그동안 사용한 적이 없단 얘기다.

특히 일반에 접근성을 높인 백서는 재난 예방을 위한 시민교육과 신뢰회복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영국에선 국민에게 안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면서 모든 해난 사고 백서를 해난조사국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김겸훈 한남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가도서관과 일반 공공기관은 물론 적어도 대학도서관 정도에는 의무적으로 배포하도록 하는 입법 또는 조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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