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관능의 법칙’서 주인공 신혜 役 연기
배우 엄정화는 지난 20여년간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온 여배우다. 남풍(男風)이 거센 영화계에서 원톱 타이틀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한 명인 데다, 그의 출연작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게 만드는 영화가 많았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에서는 결혼의 허상과 연애의 본질 사이에서 갈등하고, ‘싱글즈’(2003)에서는 29살 예비 노처녀의 고민과 일상을 허심탄회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40대 여자들의 성(性)과 사랑을 다룬 ‘관능의 법칙’(감독 권칠인, 2월13일 개봉)으로 또 한 번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나섰다.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일명 ‘칙릿’ 계열 영화의 단골 주인공인 셈이다. 그는 40대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 감성을 지닌 천생 여자에, 천생 여배우이기도 하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여성성’을 잃지 말자는 게 이번 영화가 주는 교훈 중 하나다.
“제가 총대를 메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우리 사회가 40대 여자들에게 갖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거죠. 30대 지나서 40대가 되면 여자로서의 꿈도 접어야 하는 걸까요?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요?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포기해야 될 게 왜 이렇게 많은가요. 50대 지나 60~70대가 돼도 여자들은 여전히 여자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싶어 하거든요. 저 역시 그런 여성성을 평생 놓고 싶지 않아요.”
개봉 전 언론·VIP 시사회 등을 통해 완성된 영화를 보며, 세월이 지나도 두고두고 꺼내어 볼 수 있는 작품을 한 것 같아 행복했다고. 하지만 영화 홍보를 시작하면서 본인의 결혼·나이·연애 문제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아닌가 내심 속상했다고 털어놓는 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 제 친구나 동생, 후배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작품을 찍었다는 게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싱글즈’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에 출연한다는 건 배우로서 영광이거든요. ‘관능의 법칙’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그런 작품이 될 거란 기대감이 컸고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자의’ ‘여자들의’란 수식어가 붙으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랄까. 그런데 ‘관능’은 여자뿐 아니라, 남자 관객도 충분히 공감하면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어요.(웃음)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재미있는 영화는 언제, 어디서든 결국 보게 되더라고요.”
‘관능의 법칙’은 20대 연하남과 사랑에 빠진 방송국 PD, 육체적 쾌락에 빠진 가정주부, 딸 몰래 연애하느라 바쁜 이혼녀 등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열심히 개척해나가는 대한민국 4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 중 엄정화는 직장에서는 눈썹 휘날리게 바쁘고 잘 나가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만큼은 헌신적인 40대 골드미스 신혜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신인배우 이재윤과 농도 짙은 베드신을 선보여 여전한 섹시미를 뽐내기도 했다. 그런데 한 인터뷰에서 “여배우에게 있어 노출은 노동과 같다”고 말한 게 이슈가 됐다.

“아, 꼭 ‘노동’이라고 한 것은 아닌데.(웃음) 배우로 살면서 노출이나 베드신을 피해가기 힘들고, 작품에 꼭 필요한 장면이라면 연기할 각오가 돼 있단 뜻이었어요. 사실 그 한 장면 찍을 때 머릿속은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거든요. 각도는 어떻게 나올까, 내 몸은 어떻게 보일까 등등. 그만큼 보통의 촬영보다 심신이 두 배, 세 배 더 힘들어요. 그런 의미지, 그 장면이 갖는 예술성까지 부인하려고 했던 건 아니거든요.”
이재윤은 권칠인 감독에게 직접 추천할 정도로 상대역을 100% 잘 소화해줬다고 덧붙였다. ‘역대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고, 감성적으로도 편했다. 엄정화는 극 중 문소리의 남편으로 출연한 이성민, 조민수 애인 역의 이경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요. 제 상대가 당연히 최고죠.(웃음) 평소 연상이든 연하든 상대방 나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극 중 현승(이재윤 분)이처럼 나름의 매력만 갖고 있다면 오케이죠. 이상형이란 걸 따로 정해놓고 있지는 않아요. 이재윤씨처럼 근육남도 좋고, 다소 왜소해 보여도 자신만의 매력으로 어필하는 남자도 있잖아요. 아, 영화 속 이경영 선배님 보면 ‘저렇게 푸근한 스타일도 여자를 편하게 해주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앞서 열린 한 행사에서 엄정화는 “동갑 혹은 연하남만 사귀어봤다”고 말해 화제가 된 바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원래 의미와 다르게 '연하남만 좋아한다'는 것으로 해석돼 많이 속상했다고 했다.
“연애하면서 ‘난 동갑이나 연하남만 사귈거야’ 다짐하고 사람을 만나지는 않잖아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기사 밑에는 안 좋은 댓글들이 많이 달렸더라고요. 아직도 그런 것에 초연해지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요. 그런데 사람이라면 기사 제목이나 내용, 댓글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데뷔한 지 꽤 됐는데 아직도 속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엄정화는 머지않아 새 음반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살짝 귀띔했다. 배우로서 일 년에 한 편 이상 꼬박꼬박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가수로서는 공백이 길어지다 보니 빨리 좋은 음악을 선보이고 싶다는 열망도 커졌다고 했다. 팬들은 그저 편한 마음으로 ‘원조 섹시디바’의 귀환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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