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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7〉 비슷한 듯 다른 ‘유허’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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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는 폐허나 빈무덤이 아닌 역사가 서린 ‘추모의 장’ 충남 아산의 이 충무공 유허의 사당에 조선 19대 왕 숙종은 현충사 현판을 사액(賜額)한다. 1707년 2월6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지 108년 만이다.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에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액(額)]을 걸도록 내려준[사(賜)] 것이다.

이로써 이 유허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립’ 추모(追慕)의 장(場)이 된다. 오늘의 이 역사에서 ‘남겨진 터’라는 뜻의 낱말 유허(遺墟)를 주목한다. ‘오랜 세월 쓸쓸히 남아 있는 옛터’라는 무심한 사전의 새김과는 달리 각지의 문화유산에는 이 이름이 여럿 걸려 있다.

이 충무공 유허는 아산 말고도 남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목포·진도·해남·완도·여수·남해·통영·한산도 등지의 수많은 이 충무공 추모 또는 기념 시설들은 유적, 사당(祠堂), 사(祠) 등 이름도 달고 있지만, 유허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아름다운 섬 경남 남해의 관음포 이 충무공 전몰(戰歿)유허. 건너편 광양 포스코 광활한 쇠 공장과의 사이에 있는 그 바다에서 장군은 순국했다. 이(李) 장군이 떨어진[낙(落)], 즉 돌아가신 곳을 기념하는 사당이란 뜻의 이락사(李落祠)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돌아가신 장군을 처음 뉘었던, 억장 무너지는 슬픈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 한복판을 지키고 선 이 충무공 동상. 도둑 무리 왜적을 남해에서 깡그리 부순 민족의 영웅이다. 특출한 기록 ‘난중일기’로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언젠가 여름, 그 바다를 찾은 중학생 여자아이들이 안내판 앞에서 “선생님, 유허가 뭐예요?”라고 물었다. 인솔 교사는 “폐허 알지? 망가지고 비었다는 말, 비슷해. 시체가 없는 무덤이야”라고 쿨하게 답했다. 폐허(廢墟)의 허를 ‘텅 비다’는 뜻의 허(虛)로 잘못 알았던 것이려니, 첫 단추부터 틀리게 끼운 셈이다. 또 유허는 폐허와 같지 않다. 물론 ‘빈 무덤’도 아니다.

물론 유허의 허(墟)는 그 글자가 품고 있는 허(虛)자 때문에 그런 쓸쓸한 뜻을 좀 풍기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책)의 단어로 활용될 때 이 글자는 터전, 즉 장소를 나타내는 단어다. 유허처럼 다른 단어와 몸을 합쳐 ‘역사가 서린 장소’의 뜻이 되는 것이다. 유(遺)는 ‘남기’다 또는 ‘끼치다’는 뜻, ‘유언(遺言)을 남긴다’ 할 때의 ‘유’다.

역사 서린 곳, 유허를 제대로 대접한 경우는 아산 현충사나 남해 이락사와 같이 단정하여 뿌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당연히 쓸쓸함의 상징이다. 옛 노래 ‘황성옛터’의 가왕(歌王) 조용필 본(本)은 쓸쓸함이 이리도 아름다울까 하는 색다른 경험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쓸쓸한 것은 쓸쓸하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전수린 작곡, 왕평 작사의 이 노래(1928년)도 이미 역사다. 달빛 교교한 옛 성의 폐허가 못내 슬픈 이 나그네는 누구였던가? 무지막지한 왜인(倭人)들의 지배 아래서 우리 할아버지와할머니들은 우느라 이렇게 숨죽였다. 제목의 황성은 황제의 성이란 황성(皇城)이 아니고, 황폐한 성이란 황성(荒城)임을 눈여겨본다. 무대는 개성의 옛 궁터 만월대.

그 무렵 ‘아이돌’이었던, 신파 극단 아역(兒役) 출신 가수 이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일제에 의해 바로 금지곡이 됐다. 그러나 ‘동백아가씨’와 함께 현대의 대표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처럼 이 노래도 거대한 생명체였다.

이런 역사도 폐허와 어감 비슷한 유허라는 낱말에, 또 우리의 심금에 쓸쓸하다 또는 망가진 채 방치돼 있다는 느낌을 심은 것이리라. 역사 서린 곳은 서글프다는.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춘망(春望)’ 한 구절.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나라는 깨어졌으되 산과 강은 그대로일세.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만 무성하구려.)” 반란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기억 속에서 지었다고 한다. 마음에 남은 폐허의 이 ‘그림’, 한문 아는 이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황성옛터’의 비운과 비슷한 정서 아닌가?

경쾌한 이미지의 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는 이락사 유허의 풍경. 공식적인 이름은 ‘경남 남해 이 충무공 전몰유허’다. ‘이(李) 장군 떨어지다’라는 슬픔의 이름 ‘이락’이 이락파(-波), 이락산(-山)을 이루고 혼백 모신 이락사(-祠)까지 지어내 더 친숙하다.
남해군 제공
유허가 유적이나 유물 또는 유산과 학술적으로, 또는 문화재 분야의 전문용어로 구분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한자의 뜻을 살려 그때그때 적절히 활용하는 듯한 모양새다.

가장 포괄적인 낱말은 ‘남겨진 재산’ 유산(遺産)이다. 영어의 헤리티지(heritage)와 짝이다. 유물(遺物)은 도자기처럼 물건의 모양으로 남은 유산이다. 유적(遺跡/遺蹟)의 ‘적’자는 자취나 흔적의 뜻, 건물이나 탑과 같은 형태가 연상된다. 언덕이나 기슭의 뜻 ‘허’가 든 유허(遺墟)는 유적이 모인 단지(團地·complex)의 뜻으로 읽는 게 적절하겠다.

불현듯 반쯤 부서진 채 역사의 여러 면모를 증언하던 큰 돌탑 있던 전북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가 떠오른다. 유허란 말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일 듯. 온화한 산세(山勢) 배경으로 낙낙하게 펼쳐진 폐사(廢寺)의 절집 터들이 은은하다. 이 백제 옛절은 빈터인 채로 부처님 미소를 세상에 퍼뜨린다. 가림막 속에서 공사 중인 그 멋진 돌탑은 2016년에 다시 선보인다.

허(墟)는 흙 토(土)와 빌 허(虛) 두 글자를 합친 것이다. 토(土)는 주된 뜻으로, 허(虛)는 소리 요소로 허(墟)를 이룬다. ‘허’ 발음을 가진(‘허’로 읽는) 새 단어로 ‘장소’, ‘언덕’ 같은 새로운 뜻을 지녔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형성(形聲)문자라고 한다. 형(形)은 뜻, 성(聲)은 소리를 가리킨다. 한자의 80% 정도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유허’ 같은, 낯설어 보이는 말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뜻들을 추측만으로 대충 조합하여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먼저 확인할 것. 새 ‘도구’인 인터넷과 스마트폰도 잘 활용할 일이다. 말에 주목하자. ‘말의 뜻’에 의외의 해답이 있다. 국어와 한자사전, 백과사전 앱 등과 잘 상의하면 불과 5분 안에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터. 스마트한 지식 노하우다.

‘내 지식’이 옳지 못하면, 고의는 아닐지언정, 사랑하는 이들에게까지 자칫 거짓을 가르치게 될 수도 있다. 바른 지식, 지식의 방법은 기쁨이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사족(蛇足)

장군의 이 유언, 뜻은 무엇일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 외마디에 남은 장수들은 미친 듯 북채 휘두르며 호랑이 눈 부릅떴다. 그때 이미 이순신은 영원한 승리자였다. 홀로 식어 갔을 장군을 생각하며 못내 서러워 남은 병사들과 백성들은 피눈물을 쏟았다. 서러운 그 바다, 이순신의 바다, 장군의 마지막 바다.

이락(李落)! 백성들이 가슴 저미며 붙인 이름이다. 이 장군 떨어지다, 1598년 11월19일. 그 설운 파도 바다 이락파(波), 그 바다의 곶(串) 이락산. 서슬 퍼렇던 장군이 주검으로 누우시다. 영웅의 성스런 죽음, 참배객 끊이지 않는 그 바다의 이 충무공 전몰유허가 품은 역사다. 누구나 ‘장군처럼’을 되뇌며 주먹을 불끈 쥐는 한국사의 클라이맥스다.

그 노량해전으로 왜적(倭敵)들은 패퇴했다. 훗날도 늘 도적, 즉 왜적(倭賊)으로 나타난다. 지금처럼. 그 전엔 왜구(倭寇)란 이름의 도둑떼였지. 등짝 어루만져주는 시늉하며 간(肝) 빼먹는다는, 그들의 본질이고 방법론인가. 모진 놈 이웃으로 살기, 참 피곤하다. 정신 차릴 일! 눈 부릅뜰 일! ‘독도 먹겠다’는 야욕과 전술(戰術) 바로 볼 일! 유언의 숨은 뜻일 터. 경남 남해의 그 성소(聖所)는 아늑하여 젊은 커플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바다 풍경도 멋지다. 현대식 공원의 경쾌함을 더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 ‘나라사랑순례 올래 1번지’라는 뜻 무거운 곳이 이렇게 후손들의 어여쁜 기쁨으로도 넘쳐나니 장군님 혼령도 방싯거리시겠다.

TV 코미디 등에서 충무공 최후 장면을 묘사하며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연기하는 대목은 최악(最惡)의 버전이다. 최후의 그 순간에도 우리 병사들 사기 떨어질까 걱정한 장군의 큰 말씀을 혹 무지(無知)로라도 왜곡하지 말 것, ‘적에게’라는 말 즉시 삭제하라. 화내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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