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이 유허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립’ 추모(追慕)의 장(場)이 된다. 오늘의 이 역사에서 ‘남겨진 터’라는 뜻의 낱말 유허(遺墟)를 주목한다. ‘오랜 세월 쓸쓸히 남아 있는 옛터’라는 무심한 사전의 새김과는 달리 각지의 문화유산에는 이 이름이 여럿 걸려 있다.
이 충무공 유허는 아산 말고도 남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목포·진도·해남·완도·여수·남해·통영·한산도 등지의 수많은 이 충무공 추모 또는 기념 시설들은 유적, 사당(祠堂), 사(祠) 등 이름도 달고 있지만, 유허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아름다운 섬 경남 남해의 관음포 이 충무공 전몰(戰歿)유허. 건너편 광양 포스코 광활한 쇠 공장과의 사이에 있는 그 바다에서 장군은 순국했다. 이(李) 장군이 떨어진[낙(落)], 즉 돌아가신 곳을 기념하는 사당이란 뜻의 이락사(李落祠)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돌아가신 장군을 처음 뉘었던, 억장 무너지는 슬픈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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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한복판을 지키고 선 이 충무공 동상. 도둑 무리 왜적을 남해에서 깡그리 부순 민족의 영웅이다. 특출한 기록 ‘난중일기’로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물론 유허의 허(墟)는 그 글자가 품고 있는 허(虛)자 때문에 그런 쓸쓸한 뜻을 좀 풍기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책)의 단어로 활용될 때 이 글자는 터전, 즉 장소를 나타내는 단어다. 유허처럼 다른 단어와 몸을 합쳐 ‘역사가 서린 장소’의 뜻이 되는 것이다. 유(遺)는 ‘남기’다 또는 ‘끼치다’는 뜻, ‘유언(遺言)을 남긴다’ 할 때의 ‘유’다.
역사 서린 곳, 유허를 제대로 대접한 경우는 아산 현충사나 남해 이락사와 같이 단정하여 뿌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당연히 쓸쓸함의 상징이다. 옛 노래 ‘황성옛터’의 가왕(歌王) 조용필 본(本)은 쓸쓸함이 이리도 아름다울까 하는 색다른 경험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쓸쓸한 것은 쓸쓸하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전수린 작곡, 왕평 작사의 이 노래(1928년)도 이미 역사다. 달빛 교교한 옛 성의 폐허가 못내 슬픈 이 나그네는 누구였던가? 무지막지한 왜인(倭人)들의 지배 아래서 우리 할아버지와할머니들은 우느라 이렇게 숨죽였다. 제목의 황성은 황제의 성이란 황성(皇城)이 아니고, 황폐한 성이란 황성(荒城)임을 눈여겨본다. 무대는 개성의 옛 궁터 만월대.
그 무렵 ‘아이돌’이었던, 신파 극단 아역(兒役) 출신 가수 이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일제에 의해 바로 금지곡이 됐다. 그러나 ‘동백아가씨’와 함께 현대의 대표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처럼 이 노래도 거대한 생명체였다.
이런 역사도 폐허와 어감 비슷한 유허라는 낱말에, 또 우리의 심금에 쓸쓸하다 또는 망가진 채 방치돼 있다는 느낌을 심은 것이리라. 역사 서린 곳은 서글프다는.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춘망(春望)’ 한 구절.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나라는 깨어졌으되 산과 강은 그대로일세.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만 무성하구려.)” 반란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기억 속에서 지었다고 한다. 마음에 남은 폐허의 이 ‘그림’, 한문 아는 이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황성옛터’의 비운과 비슷한 정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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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쾌한 이미지의 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는 이락사 유허의 풍경. 공식적인 이름은 ‘경남 남해 이 충무공 전몰유허’다. ‘이(李) 장군 떨어지다’라는 슬픔의 이름 ‘이락’이 이락파(-波), 이락산(-山)을 이루고 혼백 모신 이락사(-祠)까지 지어내 더 친숙하다. 남해군 제공 |
가장 포괄적인 낱말은 ‘남겨진 재산’ 유산(遺産)이다. 영어의 헤리티지(heritage)와 짝이다. 유물(遺物)은 도자기처럼 물건의 모양으로 남은 유산이다. 유적(遺跡/遺蹟)의 ‘적’자는 자취나 흔적의 뜻, 건물이나 탑과 같은 형태가 연상된다. 언덕이나 기슭의 뜻 ‘허’가 든 유허(遺墟)는 유적이 모인 단지(團地·complex)의 뜻으로 읽는 게 적절하겠다.
불현듯 반쯤 부서진 채 역사의 여러 면모를 증언하던 큰 돌탑 있던 전북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가 떠오른다. 유허란 말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일 듯. 온화한 산세(山勢) 배경으로 낙낙하게 펼쳐진 폐사(廢寺)의 절집 터들이 은은하다. 이 백제 옛절은 빈터인 채로 부처님 미소를 세상에 퍼뜨린다. 가림막 속에서 공사 중인 그 멋진 돌탑은 2016년에 다시 선보인다.
허(墟)는 흙 토(土)와 빌 허(虛) 두 글자를 합친 것이다. 토(土)는 주된 뜻으로, 허(虛)는 소리 요소로 허(墟)를 이룬다. ‘허’ 발음을 가진(‘허’로 읽는) 새 단어로 ‘장소’, ‘언덕’ 같은 새로운 뜻을 지녔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형성(形聲)문자라고 한다. 형(形)은 뜻, 성(聲)은 소리를 가리킨다. 한자의 80% 정도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유허’ 같은, 낯설어 보이는 말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뜻들을 추측만으로 대충 조합하여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먼저 확인할 것. 새 ‘도구’인 인터넷과 스마트폰도 잘 활용할 일이다. 말에 주목하자. ‘말의 뜻’에 의외의 해답이 있다. 국어와 한자사전, 백과사전 앱 등과 잘 상의하면 불과 5분 안에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터. 스마트한 지식 노하우다.
‘내 지식’이 옳지 못하면, 고의는 아닐지언정, 사랑하는 이들에게까지 자칫 거짓을 가르치게 될 수도 있다. 바른 지식, 지식의 방법은 기쁨이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사족(蛇足)
장군의 이 유언, 뜻은 무엇일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 외마디에 남은 장수들은 미친 듯 북채 휘두르며 호랑이 눈 부릅떴다. 그때 이미 이순신은 영원한 승리자였다. 홀로 식어 갔을 장군을 생각하며 못내 서러워 남은 병사들과 백성들은 피눈물을 쏟았다. 서러운 그 바다, 이순신의 바다, 장군의 마지막 바다.
이락(李落)! 백성들이 가슴 저미며 붙인 이름이다. 이 장군 떨어지다, 1598년 11월19일. 그 설운 파도 바다 이락파(波), 그 바다의 곶(串) 이락산. 서슬 퍼렇던 장군이 주검으로 누우시다. 영웅의 성스런 죽음, 참배객 끊이지 않는 그 바다의 이 충무공 전몰유허가 품은 역사다. 누구나 ‘장군처럼’을 되뇌며 주먹을 불끈 쥐는 한국사의 클라이맥스다.
그 노량해전으로 왜적(倭敵)들은 패퇴했다. 훗날도 늘 도적, 즉 왜적(倭賊)으로 나타난다. 지금처럼. 그 전엔 왜구(倭寇)란 이름의 도둑떼였지. 등짝 어루만져주는 시늉하며 간(肝) 빼먹는다는, 그들의 본질이고 방법론인가. 모진 놈 이웃으로 살기, 참 피곤하다. 정신 차릴 일! 눈 부릅뜰 일! ‘독도 먹겠다’는 야욕과 전술(戰術) 바로 볼 일! 유언의 숨은 뜻일 터. 경남 남해의 그 성소(聖所)는 아늑하여 젊은 커플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바다 풍경도 멋지다. 현대식 공원의 경쾌함을 더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 ‘나라사랑순례 올래 1번지’라는 뜻 무거운 곳이 이렇게 후손들의 어여쁜 기쁨으로도 넘쳐나니 장군님 혼령도 방싯거리시겠다.
TV 코미디 등에서 충무공 최후 장면을 묘사하며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연기하는 대목은 최악(最惡)의 버전이다. 최후의 그 순간에도 우리 병사들 사기 떨어질까 걱정한 장군의 큰 말씀을 혹 무지(無知)로라도 왜곡하지 말 것, ‘적에게’라는 말 즉시 삭제하라. 화내실라.
장군의 이 유언, 뜻은 무엇일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 외마디에 남은 장수들은 미친 듯 북채 휘두르며 호랑이 눈 부릅떴다. 그때 이미 이순신은 영원한 승리자였다. 홀로 식어 갔을 장군을 생각하며 못내 서러워 남은 병사들과 백성들은 피눈물을 쏟았다. 서러운 그 바다, 이순신의 바다, 장군의 마지막 바다.
이락(李落)! 백성들이 가슴 저미며 붙인 이름이다. 이 장군 떨어지다, 1598년 11월19일. 그 설운 파도 바다 이락파(波), 그 바다의 곶(串) 이락산. 서슬 퍼렇던 장군이 주검으로 누우시다. 영웅의 성스런 죽음, 참배객 끊이지 않는 그 바다의 이 충무공 전몰유허가 품은 역사다. 누구나 ‘장군처럼’을 되뇌며 주먹을 불끈 쥐는 한국사의 클라이맥스다.
그 노량해전으로 왜적(倭敵)들은 패퇴했다. 훗날도 늘 도적, 즉 왜적(倭賊)으로 나타난다. 지금처럼. 그 전엔 왜구(倭寇)란 이름의 도둑떼였지. 등짝 어루만져주는 시늉하며 간(肝) 빼먹는다는, 그들의 본질이고 방법론인가. 모진 놈 이웃으로 살기, 참 피곤하다. 정신 차릴 일! 눈 부릅뜰 일! ‘독도 먹겠다’는 야욕과 전술(戰術) 바로 볼 일! 유언의 숨은 뜻일 터. 경남 남해의 그 성소(聖所)는 아늑하여 젊은 커플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바다 풍경도 멋지다. 현대식 공원의 경쾌함을 더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 ‘나라사랑순례 올래 1번지’라는 뜻 무거운 곳이 이렇게 후손들의 어여쁜 기쁨으로도 넘쳐나니 장군님 혼령도 방싯거리시겠다.
TV 코미디 등에서 충무공 최후 장면을 묘사하며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연기하는 대목은 최악(最惡)의 버전이다. 최후의 그 순간에도 우리 병사들 사기 떨어질까 걱정한 장군의 큰 말씀을 혹 무지(無知)로라도 왜곡하지 말 것, ‘적에게’라는 말 즉시 삭제하라. 화내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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