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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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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2-06 08:52:58 수정 : 2013-12-06 08: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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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자국 민주화와 반(反)인종차별정책의 상징이자 '국민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남아공 '백인정부'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또 악명 높았던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에서 18년간 투옥됐고, 폴스무어와 빅터버스터 교도소에도 수감됐다.

그러나 만델라는 1990년 71세의 나이로 자유의 몸이 된 지 4년만에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올라서도 '화해와 용서'를 외쳤다.

"남아공 국민들은 끔찍했던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되 잊지 않아야 한다."

이는 그간 남아공 전 국민이 '국민의 아버지'인 그의 반복된 입원과 퇴원 소식에 마음을 졸이며 그를 위한 기도를 놓치 않았던 이유다.

◇족장 가문 출신 소년이 인권운동가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인 만델라 전 대통령은 1918년 남아공 이스턴케이프주의 작은 마을 음베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템부족 왕손의 혈통으로 족장 자문관으로 일했다.

유년시절에는 취학 전 까지 부친을 통해 템부족의 관습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후 자서전에서 자신이 부친으로부터 체격, 태도, 성격까지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고 고백했다.

포트헤어대학 1학년 재학 당시에는 불평등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정학을 맞자 자퇴를 하기도 했다. 이후 23세가 돼 부족에서 중매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그는 이번에는 요하네스버그로 가 2년 뒤 비트워터스랜드대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했다. 만델라는 이곳에서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반식민주의 운동과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했고 회의 내 청년동맹(Youth League)을 결성했다. 만델라는 이후 요하네스버그에서 흑인 최초로 법률사무소를 개업, 변호사로 활약했다.

그러던 1948년, 백인 국민당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 27년의 철창생활, 세계의 아이콘이 되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반대하는 동안 체포 투옥을 수 차례 거치며 평화시위운동을 전개했으나 1960년 경찰의 탄압이 거세지자 한때 무장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1962년 사보타지로 기소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됐으며, 1964년 다시 반역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그는 이후 27년간이나 철창 신세를 지게 된다.

남아공 정권이 그의 인권운동 노력을 외면했다 하더라도 남아공 국민과 세계 시민은 그를 알아봤다.

그는 옥중에서 1979년 자와할랄 네루상,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을 받았다.

1980년대엔 전 세계적으로 만델라 석방운동이 전개됐다.

1982년 런던 웸블리 경기장엔 7만2000여 명이 모여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라'는 노래를 불렀고, 이 화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돼 큰 반향을 불렀다. 이후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남아공 정부는 결국 1990년 2월 만델라를 풀어줘야 했다.

만델라는 출감 후 곧 젊은 시절 가입했던 ANC 부의장이 돼 남아공 백인정부와의 평화협상을 주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9월, 민족평화협정(National Peace Accord)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말 그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이다.

만델라는 1993년 인종차별을 없애는 민주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레데리크 빌럼 데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햇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

만델라는 1994년 드디어 남아공 최초의 민주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구 중 흑인 비율이 80%에 가까운 남아공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순간으로 수십년에 걸친 투쟁의 결과였다.

그는 재임 5년간 새 헌법을 만들고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발족해 지난 정권의 극악무도한 인권유린 사태를 조사하는데 힘썼다.

토지 개혁과 빈곤 퇴치, 건강보험 확대에도 애썼으며 전 세계에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고 '화합'이란 남아공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만델라는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임기를 마친 뒤 19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04년 공식적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최고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지에 평화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이후 에이즈 예방 캠페인을 진행했으며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당시에는 평화회담을 이끌었다. 또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개최하는 데도 크게 활약했다.

◇ 폐 감염증으로 최근 수차례 입·퇴원 반복…한때 사망설도

만델라는 고령으로 병세가 악화되면서 최근 2년간 병원행이 잦아졌다. 그의 입퇴원 소식은 국내외 언론을 통해 그간 주요 뉴스로 전 세계 각국에 보도돼왔다.

그는 2011년 1월 급성 호흡기 감염으로 치료를 받았고, 2012년 2월엔 복부통증 치료와 함께 폐 감염증 치료를 받았다.

같은해 12월에는 검진 차 프리토리아 제1군병원 입원, 폐감염증 치료와 담석 제거 수술을 받은 뒤 퇴원했다.

하지만 30여년간의 수감생활로 얻은 폐 감염증은 그를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만델라는 올해 3월 초 폐 감염증 재발로 10일간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그달 말 페렴이 재발돼 다시 10일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그는 결국 6월 8일 같은 증상으로 프리토리아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당시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실은 입원 17일째였던 그달 24일 "만델라가 위독하다"는 성명을 이례적으로 발표해 한때 긴장이 흐르기도 했다.

또 만델라 자녀의 유해를 둘러싼 법정 소송 과정에서 그가 식물인간상태이며 주치의들도 가족들에 생명유지창지를 끄도록 권유했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남아공 대통령실은 이를 부인했다.

이후 남아공 대통령실을 통해 만델라의 호전 소식이 잇따라 나온 뒤 9월에는 그의 퇴원 소식까지 전해졌다.

지난달 17일에는 만델라의 전 부인인 위니 마디키젤라가 남아공 일요신문 '선데이인디펜던트'에 "만델라는 표정으로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며 "상당히 위중한 상태"임을 드러낸 바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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