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발론은 그야말로 한국인의 생활도자기를 가져다 일본인들이 찻그릇으로 썼다는 주장이다. 막사발에서 한국인이 미처 발견치 못한 미의식을 일본인이 발견해 찻그릇으로 썼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급문화가 고급문화로 전이돼 사용되는 경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히 일부 그릇이 찻잔으로 전용됐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 오류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도다완은 한국서도 찻그릇이었고, 일본에 찻그릇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도다완은 말차(가루차)용 찻그릇이라는 점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은 말차문화고 한국은 잎차문화이니 이도다완은 우리 찻그릇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와 조선 초까지 한국도 말차문화가 대세였다. 말차문화 시기에 이도다완이 만들어진 것이다. 항상 문화는 전해준 쪽에선 없어져도 전해 받은 쪽에선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게 마련이다. 중국과 한국을 거쳐 전해진 말차문화가 일본엔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마치 공자가례가 중국에선 한동안 사라졌지만 한국에서 잘 보존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이번에 발굴된 이도다완엔 녹색이 짙은 일본의 말차보다는 송나라 휘종 때 유행했던 고운 가루차(백차)가 사용됐을 것”이라며 “차제에 이 시기의 차문화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찻그릇 속에 차거품을 서정적인 눈꽃으로 묘사한 시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말차문화를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박 소장은 “차를 즐겼던 몰락한 고려귀족들이 은둔자나 유불선의 풍류객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세속적 욕망을 차의 서정으로 털어버린 것이 이도다완의 차문화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며 “이들의 안목과 도공이 만나 이도다완이 탄생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를 학술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박 소장은 “향후 두문동 인사들과 가루차 문화를 좀더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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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다완을 살펴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센겐시쓰 대종장.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센리큐의 15대 종손인 그는 “센리큐가 이도다완을 처음 봤을 때 전율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된다”며 감탄했다. |
“좋네요. 매화피가 정말 좋아요. 여기 보면 밑굽이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 쭉 올라온 것이…. 다완 안쪽 바닥에 모래가 녹은 흔적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어요. 다완을 감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이도다완들은 여러 개를 겹쳐서 같이 구워냈기에 이러한 자국이 생겼어요. 이것은 그 자국이 매우 확실합니다. 매화피가 크기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점점 작아지면서 조용히 사라지는 게 보이죠. 이 정도 매화피는 드뭅니다. 매우 좋습니다. 다완은 말을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 다완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다완입니다. 센리큐가 처음 이도다완을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리큐는 이도다완의 매화피를 처음 봤을 때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도자기가 없었어요.”
조선초 다인들의 높은 안목으로 만들어진 이도다완을 센리큐가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일본다도의 기본정신으로 삼았듯이, 그의 후손인 센겐시쓰도 500년 후에 그의 선조가 만났던 이도다완의 미감을 즉각적으로 알아본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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