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6·25전쟁 중 암울했던 시기에 민족을 위한 기도… 운보 김기창 화백

입력 : 2013-10-15 21:47:58 수정 : 2013-10-15 21:47:58

인쇄 메일 url 공유 - +

2014년 운보 탄생 100주년 기념전 ― ‘예수의 생애’시리즈
“그것은 마음 괴로운 순간이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는 한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통곡을 끝내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동굴이 아닌 햇살이 눈부신 방에 앉아 화필을 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박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었다. 이 무렵 나는 예수의 행적을 더듬는 성화를 그리고 있었다. 때는 6·25전쟁의 가열로 온 민족이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냈던 1952년 전북 군산의 피란 시절이었다.”


운보 김기창(1914∼2001) 화백이 전란 중 군산 처가에서 ‘예수의 생애’ 시리즈를 그리고 있었을 때의 꿈 이야기다. 일곱 살 때 열병으로 청력을 잃은 김 화백은 미술을 길동무 삼아 평생을 창작에 매진한 작가다. 서울미술관은 17일부터 내년 1월19일까지 운보의 ‘예수의 생애’ 시리즈 30점을 모두 보여주는 전시를 마련한다. 내년 운보 탄생 100주년을 맞는 기념전이기도 하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다. 그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가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찾기 위해 한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빨간 양말과 흰 고무신, ‘바보산수’로 잘 알려진 운보는 무언(無言)과 불청(不聽)의 결함에도 왕성한 창작활동과 폭넓은 작품세계를 펼쳐 1980∼90년대 한 집 걸러 작품이 있을 정도라는 얘기가 나돌 만큼 인기작가였다. 장애복지시설을 위해선 그림을 기꺼이 내놓았던 운보는 2만여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길 정도로 다작을 했다..

예수 생애의 첫 장면으로 제작된 ‘수태고지’는 천의를 입은 가브리엘 천사가 바람을 일으키며 마리아를 찾아와 성스러운 고지(告知)를 하는 장면이다. 여인은 물레를 돌리는 것을 잠시 멈추고 짐짓 놀란 가슴을 추스르려 애쓰나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천사가 선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마리아도 녹색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고 있는 정숙한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결혼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돌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성경의 기술에 의하면 아기예수가 탄생한 곳은 말구유인데 소 외양간으로 배경이 그려져 있다.

‘산상설교’는 예수가 갈릴리에서 병자를 고쳐주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한 데 이어 가버나움 근처의 산언덕에서 행한 설교 장면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예수는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선비상이야말로 메시아에 적합한 인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의 수태를 알리는 장면인 ‘수태고지’. 물레를 돌리는 녹색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고 있는 정숙한 처녀가 마리아다. 운보는 예수의 생애를 조선조의 시공간으로 옮겨와 그렸다.
예수의 생애를 조선조라는 시공간에 옮겨 놓은 것이다. 운보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 심취됐다. 스스로 우리 민족의 생활과 정신세계가 담긴 풍속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작품화에 노력했다. 구한말의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작업도 참고가 됐다. 예수교도를 그린 소설 ‘천로역정’의 삽화를 김준근은 조선의 복식을 한 인물들로 그렸다.

기독교미술이 토착문화에 접목한 예는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인물들이 로마 고위층들이 입는 토가(망토)를 입은 모습으로 그림에 등장한다. 초기 기독교미술에서 젊고 미남형인 예수상은 그리스 태양의 신 아폴론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운보는 전란 중에 ‘예수의 생애‘를 그렸다. 암울했던 시기에 올 것 같지 않았던 평화를 예수 일대기를 그림으로써 소망했고 희구했다. 민족을 위한 기도였던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의 문하생으로 그림에 입문한 운보가 전통 채색화를 연마하고 일본 채색화풍을 받아들였던 시기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민화를 새롭게 재해석해 표현한 바보산수와 바보화조, 청록빛의 강렬한 채색풍경이 돋보이는 청록산수, 운필의 묘가 생생한 문자도 등 운보의 다양한 작품 경향도 일별할 수 있다.(02)395-0100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베이비몬스터 아현 '반가운 손인사'
  • 베이비몬스터 아현 '반가운 손인사'
  • 엔믹스 규진 '시크한 매력'
  • 나나 '매력적인 눈빛'
  • 박보영 '상큼 발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