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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삶과 싸우던 흑산도, 선교회는 섬의 희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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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 80주년 가톨릭 성골롬반외방선교회와 섬의 인연
올해 가톨릭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한국선교 80주년을 맞아 26∼27일 이 선교사들이 젊음과 사랑을 바쳤던 흑산도(黑山島)를 찾았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본섬인 흑산도는 1950년대 초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였다. 산도 검고, 바다도 검다 하여 붙여진 이름 흑산도. 근처의 홍도와 함께 국내 100대 관광명소로 꼽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중죄인을 보내던 최악의 유배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목포항에서도 250리(97.2㎞)나 떨어진 절해고도(絶海孤島)에다 비금도를 지나면서 바닷속이 80∼120m로 깊어져 한 해 3분의 2는 풍랑으로 몸살을 앓는다. 시속 60㎞의 300t급 쾌속선을 타고 질주하는데도 배가 끊임없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내려갔다 요동을 치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부 승객은 뱃멀미로 고통스러워했다. 과거 돗배를 타고 사나흘 동안 유배지로 가던 죄인 중에는 흑산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는 이도 있었을 법하다. 흑산도는 시베리아에서 동남아로 먼 길을 가는 500여 종의 철새에겐 더 없이 좋은 휴식처였지만, 육지와 단절된 채 바다와 사투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에게는 고통의 땅이었다.

이 섬에 1951년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주민들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이곳 출신으로 천주교 신자가 된 조수덕의 귀향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목활동에 나선 골롬반 선교사들은 집집마다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 우유를 배급해 보릿고개를 넘게 했으며, 흑산도에서 목포까지 물자 운반이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선박을 구입해 편의를 제공했다. 또 잠수부를 고용해 캐낸 가리비 판매수익으로 주민을 도왔고, 곳곳에 다리를 놓아 장마철 학생들의 등하교 걱정을 해결해 주었다. 1960년에는 흑산도에서 처음으로 중학교 과정인 ‘학술연구원’(성모중학교)을 개원해 무상으로 교육과 급식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목포에 있는 고등학교 진학의 길도 열렸다. 성모중학교는 1973년 군립 흑산중학교로 통폐합되기 전까지 11회, 97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 중에는 이성열 전 국회의원, 이상남 회계사, 박도순 시인 등 다수의 명사들이 나와 지역사회의 기둥이 되었다.

선교사들의 주민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00t급 선박의 건조와 수리가 가능한 대건조선소를 지어 어민들이 목포까지 나가 배를 수리하는 불편을 덜어줬고, 가난 극복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해 운영했으며, 감귤나무도 사다가 보급했다. 미8군에서 조달한 기계와 부품으로 대건발전소를 세우자 마을에는 전깃불도 들어왔다. 350가구에 전기가 공급됨으로써 전 마을에 활기가 넘쳤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 흑산성당 앞에 세워진 예수상. 어민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수상은 흑산도의 랜드마크로 통한다.
지역사회가 성장하자 교회에도 붐이 일어났다. 죽항리와 장도, 심리에 잇따라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천주교 예배소)가 세워졌고, 1958년에는 진요한(Sean Brazil) 신부의 주도로 흑산성당이 완공됐다. 현재 흑산면에만 성당 1개, 공소 6구(사리·장도·오리·다촌리, 홍도1구, 홍도2구)가 건립됐으며, 2005년까지만 해도 흑산면 전체 인구 3200명 가운데 36%가 천주교 신자였다. 지금도 천주교 광주대교구 내에서 인구대비 신자 비율은 1위를 차지한다. 주민들 중에는 세례명을 호적에 올려놓은 사람도 많고, 흑산도의 중심인 예리항 주변에는 ‘요한수산’, ‘라파엘수산’ 등 세례명을 딴 횟집이 여러 곳 있어 천주교의 교세를 짐작할 수 있다.

흑산에서 천주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 자체였다. 종교가 있었기에 삶이 가능했고, 살아 있으매 감사의 기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장도공소 이충방(72) 회장은 “천주교 진리를 접하면서 주민들 간에 신뢰도 쌓이고 밤길에 두려움도 없어졌다”며 “입은 혜택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골롬반선교회의 상징적 건축물인 흑산성당 앞에서 이준용 신부(오른쪽)와 임송 선교사(왼쪽), 이종암 전 사목회장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흑산의 주민과 천주교를 단단히 묶는 데는 조선후기 문신 손암 정약전(1758∼1816)의 역할도 적지 않다. 당시 유배자들은 죄인일지라도 양반이었기에 어부와 같은 천민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정약전은 달랐다.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1801년 흑산도 유배당한 신세였지만, 손암은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학문도 가르쳤다. 그가 어류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완성한 것도 주민과 폭넓은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흑산도 남쪽 사리에는 손암이 살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 옆에 천주교 사리공소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손암이 실학을 가르쳤던 사촌서당(복성재)이 복원돼 있다. 신안군에서는 이 일대를 ‘유배문화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이를 위해 여러 채의 초가집을 짓고 있으며, 사리공소 임송(60) 선교사를 책임자로 세웠다. 임 선교사는 여수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이라는 화려한 직함을 접고, 인생 2막을 섬마을에서 손암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교회가 지역사회와 동반성장한’ 전통을 흑산성당 29대째 주임인 이준용 신부가 이어가고 있다. 그는 흑산도의 미래를 위해 섬 안에 피정센터를 세우고, 성모중학교 건물(2개 동)을 리모델링해 ‘흑산도 생활사박물관’으로 조성하는 사업 등을 신안군과 추진하고 있다. 흑산성당에는 골롬반 선교사들이 쓰던 물품과 옛 사진들이 잘 보존돼 있어 1개동은 천주교실로 조성할 계획이다. 가거도(소흑산도)에도 공소를 하나 더 세우길 염원한다. 그래야 골롬반 선교사들이 흘린 땀이 헛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29일에는 골롬반선교회 한국 진출 80주년 미사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흑산도=글·사진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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