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의 미군에게 쓰라린 패전의 상처를 안긴 전쟁이었던 만큼 국군도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전사자 5099명에, 부상자도 1만1000명을 넘었다. 미군이 정글 제거와 시야 확보를 위해 사용한 고엽제 후유증은 지금도 9만 여명의 참전 군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베트남전 파병은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는 현대사의 사건이다. 일각에선 냉전시대 부산물로 평가절하하거나 경제개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용병 파견으로 폄하한다.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 명분이었던 ‘통킹만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판명 난 뒤에는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했다는 비판이 고조됐고, 파병 장병들의 민간인 학살 등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반면 베트남전 참전으로 한·미 동맹이 더욱 공고해지고 군의 현대화와 함께 경제성장의 발판이 됐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한·미 동맹 60주년을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베트남전쟁을 다시 돌아본다.

베트남전 파병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진 미국은 1964년 5월9일 한국 등 자유우방 25개국에 SOS를 쳤다. 우리 국방부는 그해 5월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 심의와 국회 동의를 거쳐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다. 당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남베트남 정부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점도 고려됐다.
미국의 요청이 있었지만 실제 파병을 주도한 쪽은 우리 정부였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파병 요청이 있기 전부터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논의를 구체화했다. 파병 논의의 이면에는 주한미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시켜 북한의 위협을 막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었다. 베트남에서 고전 중이던 미국은 주한미군 제7사단을 빼내 베트남으로 보냈고, 2사단마저도 한반도에서 빼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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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국군 최초의 전투부대로 베트남전에 파병된 해병대 청룡부대의 부산항 출항 모습. |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6·25전쟁의 동지였던 한·미가 손잡고 공산주의에 맞선 상징적 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은 1966년 10월 필리핀에서 열린 베트남 참전국 정상회의에서 “월남(베트남)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침략전쟁이며, 월남 방위는 이 지역 자유주의 국가들의 공동책임이므로 자유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이 평화를 위해 성의를 보일 때까지 군사적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빛난 한국군의 활약
64년 9월22일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이 호찌민(옛 사이공)에 상륙한 이래 65년 10월 해병 청룡부대, 11월 육군 맹호부대가 속속 남베트남에 도착했다. 이후 전선 확대에 따른 미국의 거듭된 추가 파병 요청으로 국군의 파병 규모는 1968년에만 약 5만명에 이르렀다. 64년 9월부터 73년 3월까지 8년6개월 동안 총 32만4864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태국·호주·뉴질랜드 등 파병국 중에서 미군을 제외하면 우리 규모가 가장 컸다.
한국군은 65년 10월 말 ‘빈딘성 풍선’ 전투를 시작으로 여단급 이상 30회, 연대급 186회, 대대급 966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득꺼·오작교·짜빈동(베트남 쩐꽝타인) 전투는 우방군과 적군 모두에게 국군의 용맹함을 과시한 대표적 전투였다. 초기 파병 병력의 대부분은 각 사단에서 뽑힌 전투력 우수자였고 부사관의 100%, 중대장급 이상 장교 90%가량이 6·25전쟁 경험자였다.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중장은 6·25전쟁 당시 북한 땅에서 게릴라전 부대를 지휘했던 용장이었다. 베트남전쟁은 남북이 갈려 싸운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6·25전쟁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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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한국군이 펼친 맹호 6호작전 현장을 시찰하는 웨스트모어랜드 주월미군사령관(맨 오른쪽)과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왼쪽에서 두번째). |
“프랑스군과 월남군, 미군이 12년간 수백만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공산군 요새를 한국 해병대가 단 2시간 만에 점령했다, 대체 우리 연합군에게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르몽드)
“한국군의 전술과 미군 전술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의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내지 그 이상의 방향에서 공격을 가해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군은 적의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이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다.”(미국 하원 증언록에 실려 있는 하원 국방위원장의 증언)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고 지시했다.”(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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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 개최된 한·미 합동 맹호도로 준공식 모습. |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정치·외교·경제 등 전방위 분야에서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과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5·16군사정변 이후 껄끄러워졌던 한·미 관계는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혈맹으로 거듭났다. 6·25전쟁 이래 피원조국의 처지에 머물렀던 한국은 파병을 계기로 자유민주진영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우리도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다는 국가적 자신감이 높아진 점도 큰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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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 국군부대 마크. |
당시 최신 소화기였던 M16 소총이 군사 원조 요청에 포함돼 M16 소총의 국내 생산이 가능해진 것도 파병의 전리품이었다. 베트남전 참전 경험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 파병으로 이어져 한·미 동맹의 결속을 더욱 굳건히 다지게 된다.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의 파병으로 기록된 ‘자이툰 부대’는 2004년 이라크에서 전후 복구 지원과 현지 군·경찰의 양성교육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다국적군사령부에서 ‘민사작전의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선임연구원, 박병진 군사전문기자 worldp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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