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으로 필요한 삶의 양식과 같은 것이 부끄러움
■기출문제
〈가〉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오는 부끄러움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2010학년도 고려대 예시 논술(인문계A)의 변형〉
〈가〉 인격체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남의 접근을 불허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영역의 경계는 문화적·개인적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다르지만, 일단 이 영역이 침입을 받게 되면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 침입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과 자신의 항구적인 인격적 규범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중략…
일반적으로 보아 부끄러움은 사람을 과소평가하거나 곤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이 개인의 부분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그 인격 전체를 건드릴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자아 감정의 교체를 야기하는 사람은 통상 우리와 아주 먼 사람도, 아주 가까운 사람도 아니다. 거리가 아주 먼 사람에게 우리는 하나의 자아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전혀 친밀하지 않아서, 그는 우리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부끄러움의 심리적 구도는 자아의식이 도덕적 과정 속에서 고양됨과 동시에 격하되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할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외적 요인은 언제나 남의 이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신과 대면해서 자신을 대상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판단, 감정, 의지를 대신하도록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로부터 분리시킨다. 마치 제3자가 하듯 우리는 자신을 관찰하며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인의 예리한 이목을 이제 우리 안에 이식한다. 마치 우리 안에 사회 집단의 의회 대표를 세우듯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원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보통의 경우 다른 사람의 이목을 통해서 일어날 내적 상황을 순전히 자신 안에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한 자신 앞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자아의 부각과 위축에 따른 부끄러움이지 부도덕에 괴로워하는 양심의 가책은 아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의 감정은 무언가 부도덕한 일을 행했을 때의 의식과 내용적으로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또 부끄러움은 도덕적인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사건과 결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기관들에 대한 자극이 자주 부끄러움의 감정을 불러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끄러움이 일어나는 심리적 구도만 보면 그것은 도덕적 기관들 그 자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그 개인은 전체의 부분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인가? 부끄러움의 감정은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전적으로 자립적인 자아와 이 자아가 존중하는 객관적 규범의 형성을 전제로 생겨난다. 그런데 개인이 집단 안으로 숨고 집단의 이해관계가 객관적 규범을 대신하면, 이 두 조건 모두가 부정된다. 전자 없이는 자아의 부각이 불가능하고 후자 없이는 자아의 위축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이 초개인적인 전체에 비해서 수행하는 역할이 미미하고, 단지 수동적인 입장만을 취할수록 더욱 심해진다. 고귀한 가문의 하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뻔뻔함’은 이렇게 설명된다. 루이 14세 때에는 “하인처럼 뻔뻔하다”는 말까지 있었다.
〈보기〉
경남 함양군 지리산 자락에 있는 작은 사찰 상무주암(上無住庵) 수좌인 현기 스님이 삶에 지친 현대인한테 던지는 화두다. 선방과 암자 옆 토굴에서 34년간 두문불출하며 수행정진에만 힘쓴 현기 스님이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30일 오전 조계사에서 간화선(看話禪)을 주제로 불자 4000여명에게 특별 법문을 한 스님은 오후에 기자들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세상이 진흙구덩이와 같으니 우리는 더더욱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세상이 더러워 공부를 못 한다는 건 변명에 불과해요.”
스님의 일상은 늘 똑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밭에서 딴 채소에 쌀을 섞어 죽을 쑨다. 식사 후에는 밭을 가꾸고 틈틈이 빨래도 한다. 토굴에 들어앉거나 마당을 거닐며 참선을 하면 금세 하루가 간다.
“사실 내 일상은 여러분과 다를 게 없어요. (수행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크고 늘 민망하죠. 나한테 마지막으로 남은 할 일은 더욱 철저해지는 겁니다.”
〈4월30일자 세계일보〉
〈가〉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오는 부끄러움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2010학년도 고려대 예시 논술(인문계A)의 변형〉
〈가〉 인격체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남의 접근을 불허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영역의 경계는 문화적·개인적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다르지만, 일단 이 영역이 침입을 받게 되면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 침입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과 자신의 항구적인 인격적 규범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중략…
일반적으로 보아 부끄러움은 사람을 과소평가하거나 곤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이 개인의 부분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그 인격 전체를 건드릴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자아 감정의 교체를 야기하는 사람은 통상 우리와 아주 먼 사람도, 아주 가까운 사람도 아니다. 거리가 아주 먼 사람에게 우리는 하나의 자아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전혀 친밀하지 않아서, 그는 우리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부끄러움의 심리적 구도는 자아의식이 도덕적 과정 속에서 고양됨과 동시에 격하되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할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외적 요인은 언제나 남의 이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신과 대면해서 자신을 대상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판단, 감정, 의지를 대신하도록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로부터 분리시킨다. 마치 제3자가 하듯 우리는 자신을 관찰하며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인의 예리한 이목을 이제 우리 안에 이식한다. 마치 우리 안에 사회 집단의 의회 대표를 세우듯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원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보통의 경우 다른 사람의 이목을 통해서 일어날 내적 상황을 순전히 자신 안에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한 자신 앞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자아의 부각과 위축에 따른 부끄러움이지 부도덕에 괴로워하는 양심의 가책은 아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의 감정은 무언가 부도덕한 일을 행했을 때의 의식과 내용적으로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또 부끄러움은 도덕적인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사건과 결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기관들에 대한 자극이 자주 부끄러움의 감정을 불러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끄러움이 일어나는 심리적 구도만 보면 그것은 도덕적 기관들 그 자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그 개인은 전체의 부분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인가? 부끄러움의 감정은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전적으로 자립적인 자아와 이 자아가 존중하는 객관적 규범의 형성을 전제로 생겨난다. 그런데 개인이 집단 안으로 숨고 집단의 이해관계가 객관적 규범을 대신하면, 이 두 조건 모두가 부정된다. 전자 없이는 자아의 부각이 불가능하고 후자 없이는 자아의 위축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이 초개인적인 전체에 비해서 수행하는 역할이 미미하고, 단지 수동적인 입장만을 취할수록 더욱 심해진다. 고귀한 가문의 하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뻔뻔함’은 이렇게 설명된다. 루이 14세 때에는 “하인처럼 뻔뻔하다”는 말까지 있었다.
〈보기〉
경남 함양군 지리산 자락에 있는 작은 사찰 상무주암(上無住庵) 수좌인 현기 스님이 삶에 지친 현대인한테 던지는 화두다. 선방과 암자 옆 토굴에서 34년간 두문불출하며 수행정진에만 힘쓴 현기 스님이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30일 오전 조계사에서 간화선(看話禪)을 주제로 불자 4000여명에게 특별 법문을 한 스님은 오후에 기자들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세상이 진흙구덩이와 같으니 우리는 더더욱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세상이 더러워 공부를 못 한다는 건 변명에 불과해요.”
스님의 일상은 늘 똑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밭에서 딴 채소에 쌀을 섞어 죽을 쑨다. 식사 후에는 밭을 가꾸고 틈틈이 빨래도 한다. 토굴에 들어앉거나 마당을 거닐며 참선을 하면 금세 하루가 간다.
“사실 내 일상은 여러분과 다를 게 없어요. (수행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크고 늘 민망하죠. 나한테 마지막으로 남은 할 일은 더욱 철저해지는 겁니다.”
〈4월30일자 세계일보〉
고려대학교는 2008학년도부터 2012학년도까지의 수시 일반전형 논술고사에서 줄곧 첫 번째 논제에 장문의 제시문에 대한 요약을 요구하였다.
2013학년도부터는 ‘요약’과 ‘비교’ 및 ‘견해서술’ 등을 900자 내외의 한 문항으로 묻는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기존에 출제되었던 논제1의 요약 문항은 고려대학교 논술의 경향과 유형을 이해하는 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많게는 3000자가 넘는 장문의 제시문을 주고 이를 400∼500자로 요약하는 것은 물론 심도 있는 독해를 요구하기에 그 자체로 난이도가 높은 논제라고 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시문의 내용은 전체 논제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제1에서의 요약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차후 문제를 출제의도에 맞게 풀어내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마지막 논제의 후반부에는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한 수험생의 견해를 묻는데, 그에 있어 제시문의 내용은 수험생의 생각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출제의도에 맞는 논술문을 정합성 있게 작성하기 위해서는 제시문을 충실하게 독해하여 중요한 내용을 잘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이렇듯 단순히 요약만을 요구하는 논제는 기존의 고려대 논제1과 아주대, 인하대의 논제1에서만 출제되는 특이한 유형이지만, 사실 제시문에 대한 요약은 제시문에 기반하여 논제가 구성되는 것이 모든 대학기출 논술문제의 공통사항임을 고려하면 논술문 작성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존의 고려대 논제1과 같이 장문의 제시문에 대한 요약을 충실하게 연습하는 것은 지망학교를 불문하고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 |
|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삶의 양식과 같은 것이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은 부끄러운 감정은 부도덕한 일을 행했을 때 자주 일어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진은 논문 표절 의혹을 받고 있는 문대성 의원이 지난해 4월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
위에서 언급된 2010년도 고려대학교 예시 논제는 ‘부끄러움’이라는 다소 생소한 주제로 출제되었다. 실제 문제는 논제1에서 500자 내외의 요약을 요구하고 논제2에서 1400자 내외의 비교 및 견해서술을 요구하는 논제로 필자가 2013년 6월2일자 칼럼에 활용했던 ‘운’문제의 토대가 되었던 논술문제이다.
〈가〉는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의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하여’에서 발췌·편집된 글로 부끄러움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심리학적·사회학적·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부끄러움은 통상 자기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의해서 생기는 수동적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시문은 이를 인격적 자아의 내적 분열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는 오히려 철저하게 자발적인 것으로 인격 전체에 대한 침해에 의해 도덕적 감수성과는 별개로 생겨나는 본성과도 같은 감정이다. 또한 이러한 감정이 자신에게 던져지는 시선의 주체와의 인격적 거리에 의존적이어서 익명의 도피처를 찾게 되면 사라진다는 점은 인간이 부끄러움의 감정을 상대적으로 경험함을 보여준다. 실제 우리는 사람마다 수치심을 경험하는 정도와 대상이 다르고, 장소에 따라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못 느끼기기도 하며, 때론 무시하기도 한다. 어떠한 행동은 아는 사람이 없을 때 망설임 없이 행할 수 있는 반면, 어떠한 행동은 지인들 사이에서 서슴없이 행하기도 하며, 이 또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단지 인간이 경험하는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과는 다른 감정이다. 부끄러움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인격적인 자아로 살아가기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삶의 양식과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수오지심(羞惡之心)과 같은 마음으로,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의로운 감정과 같다고 하겠다. 결국 부끄러움이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스스로 자립적 개체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부끄러움을 경험한다면, 제시문 〈가〉의 후반부에서 말하듯 그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그에 대한 답이 각자의 삶을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 |
| 조대우 강남인강 인문논술강사·㈜C&A논순 대치 대표강사 |
〈가〉에 의하면 〈보기〉의 부끄러움은 내적분열에 의한 인격적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감히 우리의 감정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보기〉의 부끄러움은 승려로서의 자신의 수행적인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감정이기 때문이며, 이는 일반인들이 경험하기 힘든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승려로서의 인격적 자아의 모습은 세속적인 삶과의 인연을 끊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기에 사회학적인 자아의 인격을 논의한 〈가〉의 부끄러움과는 다소 다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앞서 〈가〉에서 논의했듯, 부끄러움이 자립적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에 의해 생겨나는 주체적 감정임을 가정하면 송구함을 무릅쓰고 승려로서의 삶을 논의할 수 있을 듯하다. 매일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와 자신이 계획한 일과를 충실하게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찌 보면 승려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이 바라보는 인격적 자아의 모습은 어떠한가이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계획한다. 누군가는 사회의 일꾼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다른 이는 자신의 가족과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가길 염원하고, 또 어떤 이는 번듯한 대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은 상대적인 감정이다. 노동과 참선으로 충만한 삶 속에서 현기 스님이 전하는 부끄러움은 매일이 분주하여 부끄러움을 느낄 시간조차 아깝게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케 하는 대목이다.
조대우 강남인강 인문논술강사·㈜C&A논술 대치 대표강사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중국 화웨이의 반도체 굴기](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5/28/128/20260528519371.jpg
)
![[기자가만난세상] 베이징 하늘서 재현된 ‘해로운 새’](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09/08/128/20250908517202.jpg
)
![[삶과문화] 전쟁은 사람만 죽이지 않는다](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3/19/128/20260319520629.jpg
)
![[박일호의미술여행] 가면무도회 같은 세상](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5/28/128/20260528514209.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