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발표 ‘닉슨 독트린’ 큰 영향
연합방위체제 구성·병력 감축 실행
진보진영서 ‘미군철수’ 주장도 나와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8월8일 서울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됐다. 이를 근거로 미군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 남게 됐고 이후 60년간 주한미군은 한·미 동맹의 상징이 됐다. 한국은 성장 과정에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해준 주한미군에 큰 빚을 졌다. 다른 한편으론 일부 주한미군의 일탈행위로 국민 정서가 악화되기도 했다.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 변화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온 주한미군은 2015년으로 예정된 한·미 전시작전권 전환을 통해 위상이 바뀐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도 주한미군은 핵심 변수로 부상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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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기념식이 1978년 11월7일 서울 용산 주한미군 기지에서 거행되고 있다. 원안의 작은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이 부대 깃발을 전달하는 장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
전후 대규모로 한국에 남은 주한미군은 1960년대까지 한국의 방위를 주도했다. 더불어 대규모 원조 프로그램을 통해 군사력 건설에서도 크게 기여했다.
1954∼1968년 미국이 한국에 지원한 경제·군사 원조 액수는 약 224억달러(약 24조원)에 이르렀다. 한·미는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한·미 간 합의 의사록’을 체결(1954년)했고 1955년 한 해 동안 4억2000만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8000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했다.
전쟁 직후 직접 제공된 무기도 군함 79척과 제트 전투기 약 100대에 달했다. 한·미 합의 의사록에 따라 한국은 10개 예비사단을 추가로 신설했고 총 70만명의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한국에 대한 대규모 원조와 병행해 미군의 본국 철수도 이뤄졌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3년 12월 “(한국에서) 미국 지상군 병력을 점차 감축하겠다”고 발표하며 2개 사단 규모의 철군 계획을 공개했다. 이듬해에만 미 지상군 제40사단과 제45사단이 한국을 떠났다. 미국 조야 일각과 이승만정부는 미군 전력이 약화되면 북한이 또다시 침공할 것이라며 반대론을 펼쳤지만 미 정부가 내건 한국군 전력 강화론에 밀려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주한미군은 점차적으로 감소해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기 전에는 6만1000명 수준까지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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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 주한미군사령부 나이트필드 연병장에서 지난달 27일 열린 미8군 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이임하는 존 존슨 중장(오른쪽)과 취임하는 버나드 샴포 중장이 사열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19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은 당시 동북아 정세와 맞물려 주한미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발을 빼고 중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을 발표했다.
이후 박정희정부와 미국은 미군 철수와 대북 방위력 유지 사이에서 갈등과 협력 사이를 오갔다. 미국은 1971년 2월 최전방에 배치돼 있던 미군 제2사단의 후방이동과 제7사단 본국 철수를 실행에 옮겼고 한국은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연합방위체제 강화로 국방력 공백을 보완하기로 했다. 주한미군 감축은 한·미 연합훈련 강화와 연합군사령부 창설(1978년 11월)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연합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다.
1980년대 레이건 미 행정부가 ‘힘의 우위를 통한 공산진영 붕괴 정책’을 펼치던 기간에는 주한미군의 지위에 큰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국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미군 철수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사회적으로도 주한미군의 범죄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 요구가 높아졌다.
냉전 구도가 무너지고 미국의 대외정책이 변하면서 주한미군은 1990∼1992년 동안 제2사단 3여단 병력을 중심으로 육군 5000명과 공군 2000명 등 7000여명이 철수했다. 90년대에는 ‘한국 방위의 한국화’가 진전되면서 주한미군의 역할도 점차 변했다. 한미연합사 예하 지상구성군사령관에 한국군 대장이 임명됐고 1994년 12월1일 평시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서 한국 합참의장에게로 넘어왔다.
전시작전통제권은 2015년 12월에 한국군에게로 전환될 예정이다. 현재 양국 합참 간에 합의된 대로 한국군 대장이 주한미군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게 되면 주한미군은 전례없는 지휘 체제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미군은 세계 곳곳에 배치돼 있지만 해당국 군인의 지휘를 받은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이런 형태의 주한미군 지위를 놓고 찬반 양론이 대립하고 있다.
남북통일은 주한미군의 미래상을 좌우할 가장 큰 변수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관측이다. 통일은 대북 억지 목표가 사라진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한·미의 작전계획은 아직은 구체적 실행방안이 빠진 ‘개념계획’ 수준에 머물러 있다. 주한미군이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 이후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남북통일 과정에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도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주한미군의 성격은 미·중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김열수 성신여대 교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방중한 박근혜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지한다’고 말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통일 이후 한반도에 남을 미군에 대해 중국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안두원 기자 flyhig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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