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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7> 조(趙)씨와 조(曺)씨, 그리고 창녕조씨(昌寧曺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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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4-16 19:58:52 수정 : 2013-04-16 19: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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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시조… 선덕여왕 남편
화왕산 용지 탄생 설화 전해져
조(趙·曺)씨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조로 발음되는 성씨는 나라조(趙)를 쓰는 성씨와 성조(曺)를 쓰는 성씨 둘로 나뉜다. 그 외에도 조세조(租)를 쓰는 성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조(趙)를 쓰는 성씨라도 본관에 따라 조상을 달리해 같은 본관에서 분적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조(趙)씨와 달리, 조(曺)씨는 창녕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대부분이며, 그 외의 본관들도 창녕조씨에서 분관된 성씨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조(趙·曺)씨는 모두 135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조(趙)씨가 98만명, 조(曺)씨가 36만명 정도로 파악된다.

창녕조(曺)씨는 고유의 토착 성씨이며, 그 외 조(趙)씨 대부분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로 파악된다.

다만, 한양과 풍양조(趙)씨는 자신의 시조가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이 아니라,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뒤 성씨를 하사받은 토착 성씨라고 주장한다.

2000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본관별 인구를 보면 창녕조씨(昌寧曺氏)가 33만8000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한양조씨(漢陽趙氏)가 30만7000명, 함안조씨(咸安趙氏)가 25만9000명, 풍양조씨(豊壤趙氏)가 11만3000명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1.경주 안강에 있는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의 묘.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창녕조씨의 시조는 조계룡(曺繼龍)이다. 그는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진평왕은 아들을 못 낳아 딸인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계승했는데, 선덕여왕의 남편이 조계룡이라는 주장이다.

창녕조씨의 씨족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조계룡이 선덕여왕과 결혼하고,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경주김씨 족보에 나오는 김인평이 조계룡일 가능성이 크고, 그가 원래 성인 조(曺)씨 성을 되찾았다고 주장한다.

조계룡의 탄생설화는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조계룡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라고 전하며 그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巖村) 태생으로 그녀가 병이 생겨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 후 아들을 낳으니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 있었다. 이것을 본 이학사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신기하게 여겨 성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하지만, 조계룡 이후 세계는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가 신라 말에 이르러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내고 고려 태조의 딸과 결혼한 조겸(曺謙)이 나온다. 그래서 창녕조씨 문중에서는 조계룡을 시조로 하고, 조겸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현재 조(曺)씨는 창녕·능성·남평·옥주·장흥·안동 등 10여개 본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모두 창녕조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인다. 창녕조씨 내의 분파를 보면, 감사공파(監司公派)·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매계공파(梅溪公派)·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사의공파(司議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선무랑공파(宣武郞公派)·수찬공파(修撰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시랑공파(侍郞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장양공파(莊襄公派)·중추공파(中樞公派)·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총제공파(摠制公派)·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충익공파(忠翊公派)·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판부사공파(判府事公派)·판윤공파(判尹公派)·현감공파(縣監公派)·헌납공파(獻納公派) 등이 있다.

창녕조씨는 고려조에서는 8대에 걸쳐 평장사를 배출하고,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로 113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주요 인물로는 시조 조계룡, 중시조 조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석학이었던 남명 조식과 일제와 해방 후에 유명했던 고당 조만식, 죽산 조봉암 등이 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모두 10만5282가구에 33만82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화왕산 창녕조씨 득성비.
창녕조씨의 연혁과 인물


신라 말기 아간시중(阿干侍中) 조흠(曺欽)의 아들 조겸은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德恭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태악서승(太樂署丞)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또 조겸의 아들 조서(曺瑞)는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조서의 아들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고, 그 뒤 6대는 소감(少監) 벼슬을 배출하여 고려 명문가의 지위를 굳혔다.

조저(曺著)는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병마도원수를 거쳐 벽상삼중대신 문하시중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과 보문각 태학사를 역임하였고, 연주부원군(聯珠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조광한(曺匡漢)은 충렬왕 때 중시에 장원하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으며, 조익청(曺益淸)은 충숙왕부터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사직을 보필한 공으로 좌정승에 오르고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사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조계방(曺繼芳)은 공민왕 때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웠으나, 태조 이성계가 집권한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창녕에 은둔하였다. 조민수(曺敏修)는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격퇴한 명장이다. 그는 충근보리공신에 녹훈되고,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였으나, 반기를 들어 창녕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 조비형(曺備衡)은 조선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고, 함길·평양·경상 3도의 병마도절제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안무(安武)이다.

조상치(曺尙治)는 세종과 문종, 단종 때 성삼문·박평년 등과 함께 교류하고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다. 하지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영천으로 물러나 자신의 묘비를 미리 써놓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조상치의 호는 단고(丹皐)·정재(靜齋)이며, 정조 때 충정(忠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상치의 후손 중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았고, 문중도 번성했다.

조석문(曺錫文)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성종 때 부원군에 진봉되고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조위(曺偉)는 성종 때의 문장가로 그의 자형이 점필재 김종직이다. 어려서부터 김종직에게 수학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 성종의 총애를 받고 호조참판을 지냈다. 또 성균관 대사성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냈다. 그는 홍문관의 관료들과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완성하였으며, 그 서문을 썼다. 또 저서로는 ‘매계집(梅溪集)’이 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조숙기(曺淑沂)는 건주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병마절도사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조치우(曺致虞)는 대구부사와 사옹원정을 역임하였으며, 왕으로부터 소학 1부를 하사받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조계은(曺繼殷)·조계상(曺繼商) 형제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으며, 형인 조계은은 벼슬이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고, 아우 조계상은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세우(曺世虞)는 성균관 생원으로 있으면서 권신인 김안로와 허항 등을 탄핵했으며, 그의 재종손인 조응남(曺應南)·조진남(曺鎭南) 형제, 종손인 조열(曺悅)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창녕 대산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순절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응남·순남 형제는 정려(旌閭)되고 조열은 훈정(訓正)으로 제수되었다. 조광원(曺光遠)은 을묘왜변(명종 10년) 때 경상도순찰사로 활약하였으며, 우찬성을 지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4.조선 성리학의 거두 남명 조식의 초상.
조선조 창녕조씨의 인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남명(南冥)학파를 이룬 조식(曺植)이다. 그는 명종과 선조 때 조선의 대학자로 퇴계 이황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리산 기슭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여러 제자와 후학을 가르쳤는데, 조식의 후학들과 수많은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일어났다.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도 그중 한 사람이다. 호는 남명이며, 광해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남명집’ ‘남명학기(南冥學記)’ ‘유편(類編)’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다.

조광익(曺光益)은 선조 때 중시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조호익(曺好益)은 강동에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정주목사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저서로는 ‘지산집(芝山集)’ 등이 있다.

조탁(曺倬)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였으며, 경기관찰사와 형조참판을 지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조명욱(曺明?)도 영의정에 추증되어, 조몽정·조탁·조명욱 3대가 영의정에 추증되는 영예를 누렸다.

조우인(曺友仁)은 시와 서화에 능했으며,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와 우부승지를 역임했다. 조한영(曺漢英)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척화파의 한 사람이다. 그는 김상헌·채이항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투옥되었으나 의주로 이감되어 석방되었다. 하흥군에 봉해지고 벼슬은 한성부 좌윤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석중(曺錫中)은 조(曹)씨로 되어있던 성씨를 정조의 명을 받아 조(曺)로 환원하고, 이를 사용할 것을 문중에 전달했다. ‘창녕조씨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을 편찬하였으며,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조봉진(曺鳳振)은 창녕조씨 시조의 재실인 종덕재(種德齋)의 기문을 지었고,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조석여(曺錫輿)는 좌찬성을 지내고, ‘창녕조씨경진대보(昌寧曺氏庚辰大譜)’를 엮고 서문을 지었다. 

3.창녕조씨 득성 설화가 얽힌 용지(龍池).
창녕조씨 근현대 인물

조성환(曺成煥)은 구한 말 참위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동녕·이상설·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군사부장을 역임했다.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광복군 설립의 기초를 닦았다.

조만식(曺晩植)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안창호의 민족자강운동에 감동하여 민족산업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백성의 생활조건을 개선시키며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 후에도 북한에 남아 있다 6·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다.

또 죽산 조봉암은 일제강점기엔 좌익계열 독립운동을 했지만,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자유당과 결별하고 진보당을 결성하여 대통령 후보에 나섰으나,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했다.

그 외 창녕조씨 인물로는 제헌의원 조국현을 비롯하여 조재천 조명환 조일환 조창대 조영규 조형부 조덕현 조기상 등이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장관으로는 조재천(법무장관)·조정환(외무장관)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조재호(전 서울교대 학장)·조무성(전 광운대 총장)·조좌호(전 성균관대 총장)·조규상(가톨릭의대 교수)·조준승(경북대 의대학장) 등이 있고, 법조계에는 조우현 변호사 등이 있다.

또 한국 바둑계의 거성인 조훈현 9단도 창녕조씨이며, 판소리 명창 조상현, 성악가 조수미, 가수 조성모, 태진아(조방헌)도 창녕조씨 인물이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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