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에 없던 연설 통해 당부
기독교 세속화와 쇠퇴 개선, 전통적 가치회복에 큰힘 평가
교황청 둘러싼 스캔들 퇴위 영향

“차기 교황에 대한 조건 없는 순종을 다짐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8일(현지시간) 퇴위하면서 남은 사람들을 위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날 오전 교황으로서 마지막으로 세계 각국에서 온 추기경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여러분 중 누군가 교황으로 선출될 것”이라며 “새 교황에 대해 무조건적인 존경과 순종을 약속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여러분이 새 교황을 선출하는 동안 가까운 곳에 머물며 기도할 것”이라며 “‘합의와 조화’를 이룬 ‘오케스트라’처럼 화합해 달라”고 주문했다. 베네딕토 16세는 “8년 동안 우리는 구름 낀 어두운 하늘 같은 순간뿐 아니라 빛나는 신앙의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 해왔다”며 “우리는 가톨릭과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날 연설은 예정에 없던 것으로 재임 교황과 퇴위 교황 두 명이 존재하는 전례없는 상황에서 제기될 수 있는 분열 우려를 누그러뜨려 후임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오후 5시쯤 교황청에서 헬기를 타고 로마에서 30㎞ 떨어진 카스텔간돌포의 여름별장으로 이동했다. 교황 업무는 오후 8시 정식 종료됐다. 새 교황 선출 전까지 이탈리아의 타르시시로 베르토네 추기경이 바티칸의 사무를 보게 된다.
베네딕토 16세는 직접 ‘구름 낀 시절’이 있었다고 밝힐 만큼 재위기간 바티칸의 스캔들을 마주해 왔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78세에 교황에 취임한 그는 교황 클레멘스 12세 이후 275년 만에 등장한 최고령 교황이다.
교황은 재위기간 보수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동성애, 이혼, 인간복제 등에 반대했고 해방신학, 종교 다원주의, 여성사제 서품 문제 등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교수로 재직하던 50∼60년대에는 이름난 진보적 성직자였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해 “교황은 의사 결정 전 교회 안의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일어난 독일 대학생들의 시위과정에서 강의 도중 마이크를 빼앗기고 수업을 방해받는 수모를 당한 뒤 보수적인 입장을 띠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딕토 16세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쇠퇴에 맞서 전통적 가치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요한 바오로 6세 이후 폐지했던 교황의 의상을 다시 착용했고, 교황청의 신뢰 회복을 위해 감사기관을 신설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에도 교황청을 둘러싼 스캔들은 그가 선종 전 퇴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바티리크스’로 불리는 문서 유출 사건으로 교황청의 비리와 암투가 공개되면서 바티칸 신뢰는 크게 훼손됐다. 교황청 사제들의 과거 아동 성추행 추문도 속속 드러났고, 교황청이 과거 독일 나치 정부에게서 받은 자금을 세탁해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는 보도도 터져나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베네딕토 16세가 교회의 운영에서 완전히 물러나더라도 그의 퇴위를 둘러싼 의혹들이 새로운 혼란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지 펠 호주 추기경은 “교황은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력은 종종 혼란을 불러왔다”며 “새 교황은 교회를 통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선형 기자 linea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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