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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올해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양극화 해소, 자주적이고 유연한 외교, 국민을 위한 정치 등 2040세대의 정치적 열망을 정확히 표현함으로써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
‘광해’의 천만 관객이 특이한 사건인 것은, 이런 식의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도 영화 혼자서 조용히 천만의 신화를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용한 흥행은 지금까지 없었다. 싸이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 언론 문화부의 역량이 싸이 사태에 집중됐기 때문에 ‘광해’는 철저히 소외됐다. 또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 수상 이후에 언론의 프레임이 ‘블록버스터 대 소형영화’로 굳어지면서, ‘광해’는 대기업의 스크린 독점 사례 정도로나 치부됐다. 그런 상황에서 순전히 관객들이 이 영화를 밀어올렸다. 바로 여기에 ‘광해 천만 사태’의 특별함이 있다.
이 영화는 지금 극장을 많이 찾는 2040세대가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타격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이토록 뜨겁게 반응한 것이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스크린 독점으로 이런 흥행을 만들 순 없다. 또, 단지 영화가 재미있어서 되는 흥행이라면 천만 관객을 돌파하기 힘들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한국은 인구가 오천만 수준인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해’는 거대한 스케일의 시각효과나 자극적인 오락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도 아니다. 잔잔한 드라마형 사극일 뿐인데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나타난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건 ‘광해’가 대중의 욕망을 표현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를 통해 현재 대중이 원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관객은 지금 ‘광해’ 관람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 메시지를 읽어내면 2040세대의 열망을 알 수 있다. 그 열망이란 무얼까?

‘광해’는 어느 천민이 임금의 대역을 하며 진짜 임금다운 임금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그 천민이 궁중에 들어갔을 때 대신들은 대동법으로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에 대동법이 뭔지도 몰랐던 천민 광해는 이내 그 본질을 파악하고 대신들에게 이런 식으로 호통친다.
‘땅을 많이 가진 이에게 많은 세금을 걷고 적게 가진 이에게 적은 세금을 걷는 것이 왜 나쁘다는 말인가!’
바로 이 설정이 엄청나게 벌어진 자산양극화에 절망하고 분노해 있는 2040세대의 심장을 울렸다. 영화 속에서 자산가를 대변하는 대신들은 광해의 정책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진짜 광해는 대신들의 저항 때문에 일을 추진하지 못하지만, 천민 광해는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여기에 관객이 환호한 것이다.
이것이 국내 정치라면 대외관계의 문제도 있다. ‘광해’ 속에서 조선은 명·청 교체기를 맞이한다. 대신들은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再造之恩·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 준 은혜)’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명나라만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천민 광해는 내 나라 내 백성을 지켜야 한다며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한다. 우리도 최근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헤게모니 변환기를 맞이했다. 당분간은 미국과 중국이 각축을 벌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철저히 국익을 중심으로 한 영리하고 유연한 외교가 필요하다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다.

‘광해’에서 천민 광해는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한다느니,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따로 있다느니, 이런 생각을 모두 일축해버린다. 이 영화에선 왕족과 하급 궁녀와 호위 무사의 생명이 모두 소중하다. 천민 광해는 그들 모두를 위해 눈물 흘린다. 요즘은 인간보다 경제적 이익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양극화가 세습 구조로 심화하면서 사람의 가치에도 차등이 생기고 있다. ‘광해’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소중하며, 그 누구도 가벼이 희생돼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광해’의 천만 흥행을 통해, 바로 이런 것들이 2040세대의 열망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040세대는 지금 내부적으론 양극화 문제를 해소해줄 정책, 대외적으론 국익 중심의 자주적이고 유연한 외교정책, 그리고 서민의 마음을 헤아리며 국민 한명 한명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지도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광해’의 흥행은 제발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 달라는 대중의 아우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 영화 트렌드는 사회적 분위기로 시작했지만 이내 복고 멜로 열풍으로 바뀌었다. ‘건축학개론’과 함께 복고 열풍, ‘국민 첫사랑’ 수지 신드롬이 시작된 것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도 멜로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다 성인영화가 흐름을 형성했고, 최근엔 강간 신드롬과 함께 범죄 영화가 화제로 떠올랐다.
물론 올여름에 가장 큰 화제는 ‘도둑들’의 천만 돌파였다. 이 영화는 그 이전 천만 영화들과 달리 아무런 사회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천만 관객 돌파라는 특별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대중의 사회적 열망을 표현해야 한다는 공식을 깬 것이다. 이것이 ‘강남스타일’ 돌풍과 맞물려 B급 전성시대라는 진단이 회자했다. 대중이 더 이상 무거운 의미를 원하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올해엔 대통령 선거가 있다. 대선이 있는 해에 복고·멜로·19금·범죄물·B급 오락에만 탐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상함이 극에 달했을 때 ‘광해’가 나타났다. 언론은 미처 주목하지 못했지만, 관객은 ‘광해’를 알아봤다. 바로 이 영화가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요즘 전반적으로 자극적이고 가벼운 재미가 득세하는 트렌드인 건 맞지만, 역시 대선의 힘은 강했다.
문화평론가 ooljian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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