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기의 노예가 되는 현실에 착잡 # 수확기 농촌의 타작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타작도’에는 지주를 대신해 소작농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마름이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힘들게 타작하는 소작농의 분주한 모습과는 달리 담뱃대를 길게 문 채 지켜보고 있다. 조선시대 소작농의 현실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마름의 요구에 의해 알곡을 지주에게 바치고 나면 연명할 식량조차 부족한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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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 문화부 선임기자 |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건물주에게만 좋은 일이란 생각에 미칠 때면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식당을 때려치울 수도 없다. 부지런히 일한 대가로 배를 곯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요즘 그는 고민이 많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안 된 아들녀석이 식당일을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소작농의 대물림 같아 가슴이 아프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손에 물 마를 틈도 없이 일했건만 손에 쥔 것이 없다. 최근엔 장사도 예전 같지 않아 하도 답답한 마음에 건물주에게 가게 세를 좀 내려 줄 수 없겠냐고 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정 그렇다면 가게를 비워달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새로 들어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으름장과 함께. 그는 요즘 알 수 없는 분노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이 대공황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던 시기인 1939년에 쓰인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가 떠올려진다. 소설에 이런 대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진 자들은 굶주림과 분노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몰랐다.”
# 잘 쓰는 휴대전화 대신 최신 휴대전화를 사달라는 중학교 딸 아이의 성화에 굴복했다. 친구들도 가지고 있으니 자신도 가져야 한다는 막무가내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우리나라 부모라면 누구나 겪는 현상일 게다. 우리는 최신 기기들을 사도록 강요(?)당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구매하고 있다. 어떤 때는 정말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단지 해야 될 것만 같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게다가 최신, 최첨단 흐름을 수용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지기까지 하다. 결국 소작농이 지주에게 알곡을 바치듯 우린 IT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기술이라는 농경지를 가진 기업과 그것을 이용하는 고객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현대인은 어쩌면 기업이 가진 첨단기술이라는 농경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의 모습일는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삶이 윤택해졌는지, 진정 보다 자유로워졌는지, 그냥저냥 소작농처럼 끌려가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첨단기술이라는 땅을 가진 지주인 기업이 많은 알곡을 요구해도 거역할 수 없는 구조가 구축돼 가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조선시대의 지주가 알곡을 착취했다면 IT 기업들은 첨단기술이라는 땅을 내세워 더 많은 돈을 우리의 호주머니에서 가져가는 형국일 수도 있다.
심지어 ‘기술의 착취’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도 있다. 첨단기술이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아 IT 기업만 살찌운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우리는 기꺼이 첨단기술의 소작농이 되어 그저 ‘첨단기기만 경작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애걸복걸하는지도 모른다. 신제품이 나오면 앞다퉈 장사진을 치는 모습이 이를 말해준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일찍이 이를 예견했다. “나중에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그들의 발밑에 내려놓고 말 것이다.”
편완식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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