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임수경, 석고대죄해야 1986년 봄 대학가엔 반미구호가 넘쳐났다. 전방입소훈련 거부투쟁이 달아올랐다. “미제용병을 거부한다”는 구호가 요란했다. 중앙도서관은 순식간에 거대한 농성장으로 돌변했다. 3∼4일 지나 위기가 왔다. 강제징집을 각오해야 할 것이란 얘기가 돌았다. 공안당국의 심리전이었을 것이다. 대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히 상경한 아버지에게 끌려나가는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학과별로 회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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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 논설위원 |
그때는 알지 못했다. 떠난 80%는 남은 20%를 이해하지 못했다. 운동권 이론의 무게중심이 ‘반독재민주화’에서 ‘반미자주화’로 이동했음을 알지 못했다. 북한 주체사상이 운동권의 핵심이론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음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러나 떠난 자는 남은 자가 불편했다. 20%는 80%에게 마음의 짐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수는 그렇게 ‘부채의식’을 떠안았다.
80년대 초중반 대학을 다닌 세대는 시위에 익숙하다. 매캐한 최루탄 개스는 일년 내내 캠퍼스를 휘감았다. 군부독재정권을 향한 저항의식은 보편적 공감대였다. 누구든 학교 정문을 지나면서, 시내 한복판을 걷다가도 전투경찰에 의해 가방뒤짐을 당하고, 욕을 듣고, 연행되던 시절이었다. 시위에 몇 번 참가했다고 운동권은 아니다. 절대 다수는 시위현장을 맴돌다 현실과 타협했다. 남은 자들은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시위를 주도하고 수배되거나 구속됐다. 희생과 불운이 뒤따랐다. 그럴수록 부채의식은 떠난 자의 뇌리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부채의식은 단순히 미안한 감정이 아니었다. 남은 자들에 대한 묵시적 지지였다. 불의에 저항하는 그들의 가치지향적 삶에 대한 소리없는 응원이었다. 역사의 고비에서 사회변혁의 에너지로 분출하기도 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6·10항쟁 2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당시 저를 비롯한 젊은이들을 엄청난 부채의식속에 살게 했다. 그것이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했다”고 말했다.
남은 자들이라고 모두 ‘박종철’, ‘이한열’인 것은 아니다. 운동권의 멍에를 짊어진 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다. 떠난 자의 부채의식에 기대고, 민주화운동 경력을 발판 삼아 ‘금배지’를 달게 된 이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의 금배지엔 이름없는 희생과 떠난 자의 부채의식이 스며 있다.
그들이야말로 큰 빚을 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다 비극적으로 스러져간 이들에게, 또 부채의식을 끌어안고 살아온 말없는 지지자들에게. 그랬으면 빚진 자로서 ‘채권자’의 뜻을 헤아렸어야 했다. 그들이 믿었던 보편타당한 가치를 위해 헌신했어야 했다. 부정과 반칙, 경거망동, 시대착오의 오류를 함부로 범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석기, 임수경 의원은 정신차려야 한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되돌아보고 ‘채권자’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떠난 자의 부채의식이 선거부정을 저지르며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까지, 철지난 주체사상을 끌어안고 사람을 이념의 부속물로 보는 냉전적 사고까지 감싸주고 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모두가 진보의 이름으로 진보 가치를 훼손하는 짓이다. 이름없는 희생과 부채의식을 욕보이고 배신하는 짓이다. 부채의식부터 머릿속에 단단히 새기기 바란다. 빚진 자가 그리 뻔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류순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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