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체류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숙소인 마리나 헤밍웨이를 출발해 비냘레스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전날 헤밍웨이의 단골식당 라테라자 식당 악사들에게 산 시디를 틀었다. ‘평평한 땅’이라는 뜻의 아바나와 마찬가지로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의 자연환경도 평평하고 평온해 보였다. 파란 하늘의 흰 구름과 밭가에 홀로 서 있거나 마을 길을 따라 일렬로 서 있는 야자나무들, 그 옆에 비뚜름하게 서 있는 전봇대, 그리고 살아 숨 쉬듯 불그스름한 대지.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차는 달리고, 흰 구름 따라 멜로디가 입에 따라붙었다. ‘관타나메라’. 이 곡은 한 번 들으면 뜻도 모른 채 따라 흥얼거릴 만큼 경쾌한데, 정작 가사를 해독해 보면, 쿠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호세 마르티의 시답게 경쾌함보다는 소박함과 진솔함이 깃들어 있다.
“관타나모의 소녀 농부여, 나는 야자수가 자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라오. 내 죽기 전에 내 영혼의 시를 여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선사시대의 특이지형인 석회층 계곡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비냘레스는 아바나 남서쪽 150㎞에 위치해 있다. 입출국 절차가 까다로운데도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쿠바에 와서 이곳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다. 선사시대의 계곡과 동굴 등의 지형과 세계 최고의 품질로 공인된 시가(cigar·담뱃잎을 썰지 않고 통째로 돌돌 말아 만든 담배, 일명 엽궐련)의 생산현장을 돌아보는 것이다. 아바나를 떠나 소박한 시골에 난 도로를 2시간 정도 달렸던가. 차가 비냘레스로 진입하는 삼거리에 이르자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대형 현수막이 길가에 펄럭이고 있었다. 오전 10시 무렵이었고, 사람들을 태운 트럭이 신호에 걸려 체의 얼굴을 가린 채 정차해 있었고,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또 몇몇은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비냘레스 도심에는 쿠바의 국책 사업인 시가 제조공장이 있고, 나는 그곳에 가려던 참이었다.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비냘레스라는 곳이 면사무소 소재지 정도의 크기라니 시가공장에 들러 몇 발짝 거리를 걸어다니다 보면 그들과 마주칠 것도 같았다. 그들은 활기차 보이지는 않았지만 ‘관타나메라’ 노래에서처럼 순박해 보였다. 비로소 사람 사는 마을에 당도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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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농가의 담배밭과 건조창고. |
파스텔톤의 페인트칠이 된 2층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가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비냘레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웠던 과거의 형상을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곳에 온 적이 없고, 그러므로 이곳을 떠난 적이 없는데, 정수리 위에서 은근히 따갑게 번지는 아침햇살 탓인지, 나는 이곳에 오자마자 어떤 아련한 향수(鄕愁)를 느꼈다. 아바나에서 편안하지 않았던가. 고작 두 시간 여를 달려와서 아바나를 돌이켜보다니. 아바나로 돌아가면 마지막 밤을 도심의 호텔에서 보낼 것이었다.
내가 사흘 동안 머문 곳은 헤밍웨이가 낚시를 즐겼던 아바나 북동부 마리나 헤밍웨이, 운하 지역이었다. 항도 아바나가 면한 대부분의 바다는 카리브해, 내가 머문 마리나 헤밍웨이는 대서양 연안. 쿠바와 미국 간의 관계는 헤밍웨이가 본국으로 추방되던 1961년부터 현재까지 악화 상태에서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자본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마비를 의미했고, 그 여파로 근사한 외양과 운치에 비해, 속에선 녹물이 흐르고 밖으론 허물을 벗듯 건물마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치 절에 갈 때 마음에서 되풀이해서 울리는 ‘나무관세음보살’처럼, ‘관타나메라’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모의 소녀 농부여,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시가 공장으로 통하는 문은 좁고, 내부는 어두웠다. 들어서자마자 습기와 건초향이 느껴지는 찐 담뱃잎 냄새가 콧속에 끼쳐 들어왔다. 작업장은 뜰을 가운데 배치한 서구 건축물의 정형에서 입구를 제외한 디귿(ㄷ)자 형태의 세 곳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치 봉제공장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잠시 들었고, 네다섯 명을 한 팀으로 하는 긴 작업대가 열 줄 정도로 배치돼 있었는데, 남녀노동자들이 숙련된 손놀림으로 각자 맡은 바 분업에 충실하면서도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을 의식하며 때로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여행자들은 담배 농장에서 건조해온 큼지막한 이파리들이 여러 과정을 거쳐 한 개비의 시가로 탄생하는 광경을 관람하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나는 그들 틈에 끼어 누군가가 들려준 시가 공장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눈으로 찾았다.
담배를 마는 노동자들 옆에서 책을 읽어주는 사람. 내 귀를 솔깃하게 했던 이 흥미로운 존재는 그러나 지금은 찾을 수 없었다. 라디오시대를 거쳐 스마트폰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가 앉아 있었을 법한 자리라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디에도 책 읽어주던 사람의 자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공장에서 빠져나와, 문득 그를 대신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라디오는 혹시 있었던가 돌이켜졌다. 기억나지 않았다. 라디오 한 대쯤 옆에 있었던 것으로 부러 생각했다.
쿠바 시가 중 최상품에는 ‘몬테크리스토’, ‘로미오와 줄리엣’, ‘코히바’ 등의 이름이 붙여 있다. 풍문에 의하면 이들은 시가 공장의 책 읽어주는 남자들과 관계가 깊었다. 라디오가 없던 시절, 하루종일 앉아서 담배를 말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 현장에는 책 읽어주는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 이들이 읽어주는 책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았던 작품이 ‘몬테크리스토’와 ‘로미오와 줄리엣’. 이 중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시가는 ‘몬테크리스토’. 체 게바라가 즐겨 피웠다는 후문이 인기에 한몫하고 있었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좁고 컴컴한 공장에서 온종일 담배를 마는 사람들, 그들의 귀를 사로잡았던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로미오, 그리고 줄리엣은 얼마나 먼 나라의 이야기들인가. 자신들이 마는 담배 한 개비를 월급의 반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소설이나 문학을 떠나 이야기란, 새삼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시가 제조공장을 돌아나오는 내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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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농가의 농부가 윗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고 있다. |
시거 제조공장에서 곧바로 비냘레스 교외 담배농장으로 향했다. 사방에 담배밭이 펼쳐졌고, 담배밭에는 붉은 흙이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바나에서나 쿠바의 시골 마을에서 쉴새없이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사람들의 이동 방법. 아바나는 올드 카 뮤지엄이라 불릴 만큼 전 세계 자동차가 질주한다. 이곳 비냘레스에서 사람들은 주로 걷거나 자전거나 말을 타고 다닌다. 이곳 비냘레스는 해발 600m 높이의 동글동글한 산들이 병풍처럼 에둘러 있고, 야자수들이 서 있는 초원이 펼쳐져 있고, 밭에는 말들이 띄엄띄엄 풀을 뜯고 있거나 사람을 태우고 길을 간다. 담배밭 가에는 홀로 훌쩍 자란 야자수가 허공을 가르며 서 있고, 야자수 옆에는 온통 밀집으로 지붕을 길게 내린 담뱃잎 건조창고가 지어져 있다. 이들 풍경 앞에 서면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진공 상태에 빠져 버리는데, 그때마다 관타나모의 소녀 농부에게 바치는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희미하게나마 현실을 일깨워 준다. ‘나는 야자수가 자라는 시골 사람, 내 영혼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네.’
팻말을 따라 야자수가 서 있는 담배 농가 마당으로 걸어들어갔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본채와 담배 창고 두 채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집을 빙 돌아 담배밭이었다. 담배는 막 심어져 뿌리를 내리고 이파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야자수 옆에는 담배 건조창고가 지어져 있었다. 서부영화에서 나올 법한 훤칠한 사내가 윗주머니에서 시거를 꺼내 건넸고, 부엌에서는 어머니와 며느리가 직접 재배해서 볶은 커피로 커피를 내려 따라 내주었다. 그러고 보니, 멕시코와 함께 쿠바는 적도 부근의 커피 생산지. 사실 추운 겨울이 없으므로 농작물은 2모작, 3모작까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농부의 말에 의하면 이곳 담배 농사에는 철칙이 있었다. 담배라는 것은 1년에 단 한 번, 다른 작물 농사와 병행하면 안 되고, 오직 담배 재배에만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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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팥밥과 타로토란, 토마토양배추샐러드와 숯불돼지바비큐. |
쿠바 시거는 절대적으로 비냘레스의 기후와 토양의 산물이다. 이 시거와 함께 쿠바의 상징으로 알려진 것은 선사시대 쥐라기 지형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담배와 사탕수수가 자라고, 토마토와 타로토란, 그리고 팥 등이 재배된다. 담배 농가 인근에 있는 계곡에 그려져 있는 벽화와 석회동굴인 인디오 동굴을 깊숙이 탐사한 뒤 점심식사를 위해 로컬푸드를 자랑하는 핑카 산 비센테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시거와 럼이 쿠바를 대표하는 특산이라면 21세기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 쿠바의 로컬푸드. 아바나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 것이 이들의 검박한 식탁. 이곳의 음식들은 거의 조미하지 않은 생식 위주. 조미를 하더라도 최소한으로 보조하는 정도. 나는 처음 그것이 식량 부족으로 인해 음식 문화가 개발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비냘레스에 이르면서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이곳의 자연 그대로의 토양과 그 토양에서 자라는 야채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것으로 소박한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의 삶의 원칙, 곧 살아가는 법칙이 아닐까. 어떤 것도 자극적이지 않았는데, 특히 어릴 때 엄마의 손맛으로 길들여진 검정팥밥 아로스 콩그리의 맛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비냘레스에서의 점심식사, 혀끝에 닿을 때 미끌하면서도 담백한 타로토란의 맛은 아바나를 떠날 때까지 혀끝에서 아련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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