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잘못 너무 커… 더이상 회피 안돼”
靑 총선후 교체설 속 사전 교감 가능성 조현오 경찰청장의 사의 표명은 9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기자회견 30분 전쯤 공개된 대국민 사과문 원안에는 없었던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습니다”라는 말이 조 청장의 입에서 떨어지자, 배석했던 참모들도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원안에 있던 ‘어떠한 비난과 책임도 회피하지 않겠다’는 말은 ‘원론적 의미’ 정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2010년 8월30일 취임 이후 수차례 ‘사퇴설’에도 흔들림 없던 조 청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은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 때문이다. 사건 처리과정에서 나타난 경찰의 총체적 무능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와 질타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사퇴 외에 마땅히 수습할 카드가 없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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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하는 유족들 수원 20대 여성 살해사건의 유족들이 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을 방문, 조현오 경찰청장(오른쪽)에게 경찰의 부실 대응 및 축소 수사에 항의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
조 청장이 기자회견에서 “주말 저녁뉴스를 보면서 ‘벌써 사건 발생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계속 국민을 분노케 하는구나’ 생각했다”며 “경찰의 잘못이 워낙 커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지겠나 (싶었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조 청장은 기자회견 30여분 전에 사건 당일 피해 여성과 112 직원과의 통화내용을 모두 청취한 뒤 사실상 마음정리를 했다는 후문이다. 통화 내용을 모두 듣고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경찰이 책임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판단,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원문을 ‘물러나겠다’는 표현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학교폭력 근절대책을 추진해 오던 조 청장의 전격적인 사의 표명에 경찰 내부에서는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조 청장이 4월 말까지 학교폭력 문제를 일단락짓고 다음 이슈로 ‘인권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 있었는데 뜻밖이다”고 말했다. 청와대와의 사전 교감설이 나오는 배경이다.
조 청장은 “혼자서 내린 결정”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조 청장이 기자회견을 하기 전 이달곤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 이 사건 경위와 경찰의 112 늑장대응 등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받은 뒤 몇 초간 침묵했으며 “정부의 가장 기본적 역할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조 청장의 사의 표명 뒤 청와대가 즉각 수용 의사를 밝힌 점도 이 같은 분석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게다가 청와대가 총선 후인 4∼5월 중으로 경찰청장 교체를 검토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시점이었다. 조 청장이 8월 말까지 2년 임기를 채우게 되면, 정권교체 시 후임 경찰청장은 내년 2월까지 ‘반쪽짜리’ 청장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청와대가 이번 사건을 조 청장을 낙마시키는 명분으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에서는 ‘좀 더 두고 보자’는 입장이었는데 조 청장이 일방적으로 사의를 밝혔다”며 “청장 교체카드는 정권 차원에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써버리게 돼 허탈하다”고 말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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