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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걷기여행] 처음처럼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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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보여요! 내 눈에도 용닝이 보여요!”
산중턱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아줌마와 나의 종착지, 용닝. 엄청 감개무량할 줄 알았더니, 안도의 한숨부터 새나온다. ‘휴우, 이제 살았네.’ 싶었던 거다.

“앞으로 두세 시간만 더 걸으면 되겠죠?”
배낭을 고쳐 메며 아줌마에게 물었다.
“어림없어요. 족히 너덧 시간은 걸릴 거예요. 이런 속도라면 여섯 시간도 모자랄걸요.”

아줌마 이야기를 들으니 배낭이 점점 더 어깨를 짓누른다. 진이 다 빠진 모양이다. 앞으로 남은 18킬로미터가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좡즈의 푸미족 할아버지 댁에서 용닝까지 직선거리는 27킬로미터. 아줌마의 바람대로 차를 탈 수도 있다. 하지만 차를 탄데도 오래 걸리긴 마찬가지다. 무려 3시간 30분이 소요된단다. 워낙에 길이 나쁜데다가 원시삼림을 에돌아 와야 해서. ‘이곳이 얼마나 오지인가!’ 피부로 느껴진다. 푸미족 할아버지 댁에서는 핸드폰이 아예 먹통이었다. 전혀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날마다 국제전화를 걸어 내 안위를 확인하는 남편, 엊저녁에는 애 좀 탔을 거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산행 처음으로 인적이 포착됐다. 집이라기에는 한없이 초라한 움막 몇 채. 쓰러져 가는 움막 앞으로 제법 널따란 무밭이 비스듬히 자리했다. 마침 무를 캐던 농부가족이 아줌마와 나를 보고는 “맛이나 좀 보고 가요.” 한다. 강화도 순무처럼 빨간 무가 아주 달게 생겼구먼. 아줌마는 고맙지만 시간이 없다며 사양한다. 살얼음이 녹은 흙바닥이 질퍽한 찰흙 같다. 아주 미끌미끌하다. 아줌마와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끝에 사력을 모았다. 산행 7시간 만에, 끝날 것 같지 않은 원시삼림을 겨우 벗어났다.

“저기 마을 보이죠? 양핑춘(洋平村)이란 이족 마을이에요. 저기서는 절대로 사진 찍으면 안 돼요. 사진기를 아예 가방에 넣어둬요.”
“왜요?”
“이족 사람들, 인심이 아주 사나워요. 지난번에 트레킹 하던 프랑스인이 여기서 사진 찍었다가 200위안이나 뜯겼다니까요.”
“에이, 인물 사진을 마음대로 찍었나 보죠. 단순히 풍경을 찍은 게 아니라!”
“아무튼요. 마을 사람들이 마구 달려들어서 돈 내놓으라는 통에 안 줄 수가 없었어요.”

단 한 번의 경험이 때로는 무서운 선입견이 된다. 추수가 끝난 드넓은 대지며, 올망졸망 맞댄 처마가 인심 좋은 농촌마을로 같은데. 아줌마 말을 듣고 나니 나부터 단속을 한다. ‘여행자의 무례한 행동이 있었을 거야.’ 생각하면서도, ‘이 동네 사람들 눈에는 외국인이 호구로 보이나 보지?’ 했던 거다.

막상 마을에서 만난 이족 사람들은 아주 순수했다. 눈이 마주친 동네 여인들에게 “니 하오.” 했더니 다들 웃으며 “니 하오.”한다. 사자 머리처럼 검은색, 파란색, 분홍색 레이스가 층층이 달린 이족 전통 치마를 입고 용닝 장에 다녀오는 여인은, 조금만 더 걸으면 되니까 힘내라며 응원을 해준다. 동네 아이 몇 명은 나를 보자 멀리부터 “헬로우”, “헬로우” 소리치며 뛰어 온다. 저리 반갑게 인사하며 뛰어오는 아이들을 나도 반겨주고 싶다. 평소라면 아이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폴라로이드 사진도 찍어주고 이야기도 나눴을 거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여력이 없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중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인사는 해야지. 잠시 뒤돌아 서서 양손을 흔들며 “헬로우.” 답인사를 한다. 이내 앞을 보고 열심히 걷는다.

양핑춘을 지나서도 야트막한 언덕을 여러 개 넘었다. 드디어 비포장도로가 고개를 내민다. 지그재그 뻗은 이 도로가 곧바로 용닝으로 통한다. 아줌마는 도로를 확인하고 두 다리가 풀린 모양이다. 맥없이 그대로 주저앉는다. 얼굴에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나도 아무렇게나 배낭을 던져두고 아줌마 옆에 철퍼덕 앉았다. 우리 행색은 영락없는 부랑자. 꾀죄죄하기가 이를 데 없다.
“여기까지 걸어왔으면 용닝에 도착한 거나 진배없어요. 여기서부터는 차 좀 타고 가요.”
“겨우 다와 가는데, 우리 끝까지 걸어서 가요, 네?”

고집을 부리는 내게 아줌마는 하는 수없이 “오케이”란다. 길 위에서 아줌마는 내게 나침반이고 친구이며 보호자였다. 그런데 나침반을 너무 혹사시킨 것 같아 미안하다. 이 도보여행이 끝나면 아줌마와도 이별이다. 불과 10킬로미터 정도만 걸으면 나는 루구호로, 아줌마는 다시 스토우청으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아줌마, 용닝에서 하룻밤 자고 가요. 저랑 제일 맛있는 음식 먹고, 제일 좋은 호텔에서 푹 자고 가요. 우리의 성공적인 도보여행을 자축하면서 맥주도 한 잔 하고요. 제가 쏠게요.”
아줌마도 좋단다. 곧 헤어져야 한다니 허전하고 섭섭해서일까. 점점 힘이 빠진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터덜터덜 걷는다. 아줌마도 나도 다리를 질질 끌면서. 원시삼림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이 편리를 위해 산을 깎아내고 다진 길이, 인간이 걷기에는 오히려 적합하지 않다. 쌩쌩 달려대는 사륜구동과 승용차, 희뿌연 매연을 뿜어대는 낡은 트럭, 굉음으로 귀청을 따갑게 하는 경운기, 순식간에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오토바이까지. 도로의 무법자들이 아줌마와 나를 위협한다. 최대한 도로 바깥으로 붙어 걷고 있다.

“저 다리만 건너면, 진짜 용닝이에요.”
아줌마가 가리키는 다리는 1km도 채 남지 않았다. 감동이 파도처럼 출렁여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줄 알았더니. 가슴이 벅차고 기뻐서 더덩실 춤이라도 출줄 알았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짝짝짝 박수 치는 것으로 기쁨을 표한다.

지금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는다. 어두운 터널에 갇힌 것처럼 힘들었던 일상의 시간들, 이 여행을 결심하기까지, 막상 걸으면서 순간순간 벅차 올랐던 감동들이 일순간 파노라마처럼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이 하나. 스토두청에서 용닝까지 110km를 걸으며 내가 맡은 자연의 향기와 바람결이 내 가슴 깊이 아로새겨지기를. 그리고 오래오래 간직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무겁지만 처음처럼 변함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것뿐이다.

여행작가 고승희(blog.naver.com/koara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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