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마법사’의 행간을 메우는 기발한 발상
‘위키드’는 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행간을 파고들며 새로운 시각으로 써내려간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판타지 소설 ‘위키드:괴상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을 무대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조연에 불과했던 동쪽 마녀와 서쪽 마녀가 마법학교 동기동창이었다는 기발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서쪽 마녀는 왜 물만 끼얹으면 죽는가, 허수아비와 양철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등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의문부호로 작품은 열리고 닫힌다.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오즈 세계에 오기 전 오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를 상상해가는 신선하며 철학적인 스토리텔링은 결국 뮤지컬 무대에서 콘텐츠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왕따지만 의협심 강한 소녀 엘파바, 겉모습과 특권을 누리기 좋아하는 허영소녀 글린다가 마법학교에서 만난다.
이들이 나누는 우정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허물어지며,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마녀 이미지를 만들어가는가를 보여주는 무대는 원작소설에 빚진 바 크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본 관객이라면 숨은그림찾기 하듯 재미있게 볼 만한 복선이 널려 있다. 하지만 부담은 버려도 좋다. 배경지식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의 눈높이에서 읽어도 무방하다. ‘오즈의 마법사’ 내용조차 가물가물한 한국 관객이라도 온 힘을 다해 무능한 권력자인 마법사와 싸우겠다고 다짐하며 하늘 높이 떠오르는 엘파바의 절창 ‘중력을 넘어서(Defying Gravity)’를 들으면 덩달아 체온이 상승한다. ‘금발이 너무해’의 금발미녀를 연상케 하는 글린다가 초록마녀 엘파바를 치장해주며 부르는 곡 ‘파퓰러(Popular)’의 생기발랄한 리듬에 절로 무릎박수를 치며 입을 쫑긋거리게 된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왕따와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초록피부의 왕따소녀 엘파바와 기묘한 우정을 이루며 동반 성장해가는 인기소녀 글린다의 마법 같은 스토리는 우리의 편견에 일침을 가할 만하다.
198억원짜리 ‘오페라의 유령’ 기록을 깨는 최대 제작비 200억원(한국공연)이 소요되는 ‘위키드’는 2004년 토니상 무대디자인상과 의상상을 받은 무대와 의상, 17인조 오케스트라의 중독성 강한 뮤지컬 넘버 연주 등 기록적인 스케일로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다. 호주 멜버른에서는 250만명 중 50만명이 봤을 만큼 대성공을 거뒀고, 일본에서도 2007년 극단 시키(四季)의 라이선스 공연 티켓박스가 오픈하자마자 8개월치 티켓이 매진됐다. 만든 지 10년 가까이 돼가는 연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1월 브로드웨이 박스 오피스에서 흥행 4위, 총 매출액 1위를 기록 중인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대 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3000만명이 관람한 상태다. 하지만 사랑보다 우정에 방점을 찍은 드라마 구조상 국내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기엔 러브 라인이 약한 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불어 거대한 용과 시계추로 꾸민 묵직하고 상징적인 무대가 멜로 지향적 한국 관객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킬지 지켜볼 일이다.
이날 공연을 함께 관람한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교수(순천향대)는 “우리가 그간 흔히 보아온 대형 블록버스터 뮤지컬들과 달리 서로 다른 두 소녀의 우정을 촘촘히 쌓아올리는 구성과 뮤지컬 넘버, 수준급 연기가 돋보이는, 진일보한 작품”이라면서 “한국영화 ‘방자전’처럼 잘 알려진 원작을 비틀어 새 생명력을 얻게 만드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 못지않게 문화산업의 중요한 견본 사례로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2001년 ‘오페라의 유령’에 이어 ‘위키드’의 한국 프로듀서로 나선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는 “전 세계적 흥행 뮤지컬이지만 블록버스터나 가족 뮤지컬이 아닌 이 시대에 필요한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로서 2002년 ‘오페라의 유령’으로 산업화에 진입한 한국 뮤지컬 시장을 또 한번 점프시킬 만한 뮤지컬”이라면서 “9·11 테러 이후 10년간 무겁고 심각한 작품보다 발랄하며 꿈의 세계를 그리는 작품이 성공하고 있는 브로드웨이 시장의 향후 트렌드를 읽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싱가포르 공연을 마친 후 ‘위키드’ 호주 프로덕션팀의 내한무대는 설앤컴퍼니와 CJ엔터테인먼트의 공동제작으로 오는 5월31일부터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펼쳐진다.
싱가포르=김은진 기자 jisland@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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