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너무 재미있는데, 뭐죠? 이 슬픈 기분은….”
영화 ‘부러진 화살’ 시사회를 보고 나온 한 관객이 속내를 이렇게 털어놨다.
잘 알려진 대로 ‘부러진 화살’은 5년 전 발생한 일명 ‘석궁 테러사건’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1990년대 ‘남부군’ ‘하얀 전쟁’ 등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작품을 주로 선보였던 정지영(65) 감독이 13년 만에 내놓은 작품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요즘처럼 대기업 기획영화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한국영화계에서 작가정신으로 똘똘 뭉친 작품이란 점에서, 거장의 귀환이란 점에서 반갑고 고마운 영화다.
극중 특별출연한 배우 문성근이 넌지시 내민 동명 르포르타주 소설을 읽고 저예산으로라도 이 영화를 만들어내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정 감독.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작품성에 있어서나 대중성에 있어 군더더기 없이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석궁 테러사건은 재임용을 위한 교수 지위 확인소송에서 패한 S대 수학과 김명호(극중 이름은 김경호) 교수가 2007년 1월15일 담당판사를 찾아가 석궁으로 위협한 사건이다. 실제 석궁이 발사됐는지, 판사가 김 교수에 의해 상해를 입은 게 사실인지 여부와 관련해 의혹투성이지만, 당시 사법부는 김 교수의 사건을 법치국가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규정짓고 유죄판결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부러진 화살’은 동명소설과 공판기록, 당사자 및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석궁사건 재판과정에 있어서의 아이러니한 상황들과 사법부의 모순된 태도 등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직접 법전을 들추며 판사와 검사들에게 스스로를 변호하는 김경호 교수(안성기 분), ‘법은 쓰레기’라고 외치면서 김 교수 옆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박준 변호사(박원상 분)의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6일 늦은 저녁 경기 고양시 일산 화정동에 위치한 아우라픽쳐스 사무실에서 정 감독을 만났다. 아우리픽쳐스는 ‘부러진 화살’의 제작사이자, 정 감독이 만든 영화사다.
“주변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코미디 영화는 분명 아닌데. 요즘 감각에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건 정지영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이 영화의 구성인자들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극중 김경호 교수나 박준 변호사 캐릭터 자체가 재미있거든. 피고인이 직접 판사하고 법정공방을 벌이는 거나, 변호사가 아파트에서 부항기를 떨어뜨려놓고 누가 맞으니까 ‘증거인멸!’ 외치는 상황이나 다 웃기잖아요.”
법정영화 특유의 무겁고 진지한 내용이 주를 이룰 거라는 예상을 깨고 ‘부러진 화살’은 곳곳에 웃음코드가 배치돼 있어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고 극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마치 다윗과 골리얏의 싸움처럼 개인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한 장벽은 씁쓸하면서도 슬픈 기분을 느끼게 한다.
“김경호 교수의 싸움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에요. 예전 ‘하얀 전쟁’이나 ‘남부군’이 유쾌하지 않은 결말이었다면, ‘부러진 화살’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나마 기분 좋은 결말이죠. 그런 데도 뭔가가 찝찝해요. 유쾌하긴 한데 거대한 사회구조의 모순에 결국 개인이 지는 현실이 찝찝하고 슬픈 거죠.”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프리젠테이션에 초청돼 관객들에게 처음 공개됐을 당시, 정 감독은 ‘진보주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얘기를 참 많이 들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보수적인 사법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내용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난 진보적인 영화인 쪽에 속하는 게 맞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는 확실히 진보 성향의 영화가 아니에요.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를 찾아가려는 영화라고나 할까. 김 교수(안성기 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예요. 사회가 합의한 걸 지켜나가는 게 보수라면 김 교수는 보수가 맞죠. 법을 지키면서 사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법부에 ‘법대로 해 달라. 왜 법대로 안 해주느냐’고 따지는 인물이에요. 김 교수가 진보가 아니라, 사법부가 제대로 된 보수의 가치를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 그의 옆에는 진보 성향의 변호사가 착 달라붙어 있어요. 이 얼마나 웃긴 상황입니까? 진보주의 변호사가 보수의 가치를 바로 세우려는 김 교수를 옆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게? 그런데 사람들은 정지영 감독이 진보주의자라서 이런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이것 또한 웃긴 현실이죠.”
영화를 보다 보면 구치소 간수들이 읽고 있는 신문 헤드라인에 ‘BBK사건이 진짜라면 대통령직을 걸겠다’ 문구가 등장하거나 인물들이 박근혜 의원 커터칼 위협사건을 언급해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해 정 감독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이슈되는 사건을 찾았을 뿐이라며 확대 해석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묘하게도 시대상황이 일치했죠. 아직까지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석궁사건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사용된 미장센인데, 개봉시기와 맞물려 그게 이슈가 될 줄은 몰랐어요. 지금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진정한 보수를 잃어버린 게 사실입니다. BBK사건에 대해 제대로 파고드는 것이 바로 보수죠. 숨기려고만 하는 것은 잘못된 보수고, 배척해야 할 보수예요.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는 게 보수라면, 잘못된 것은 바르게 고쳐나가려는 의지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부러진 화살’로 화려하게 재기한 정 감독은 현재 다른 작품을 머릿속에 구상 중이라고 덧붙였다. 다음 영화 역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거나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한 작품이 될 거라고도 귀띔했다. 쉽게 부풀었다 쉽게 가라앉는 요즘 한국영화계 분위기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후배 영화인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화인들끼리 공감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뜻이 다르다면 몰라도 침묵하지 말고 함께 모여서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어요. 숨거나 가만히 있지 말고 확실히 나서서 사회에 힘을 보태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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