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현악·국악 특화교육… 1인 3종류 이상 악기연주 ‘척척’
농어촌 등 소외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문화 예술교육을 통해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관에 가본 적도 거의 없는 초등학생들이 메가폰을 잡고 전국 굴지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쓰는가 하면, 폐교 위기에 놓였던 학교는 예술교육으로 다시 살아났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2008년부터 진행해온 ‘예술꽃 씨앗학교’ 사업의 결실이다. 지난 18∼19일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이들의 성과를 되짚어보는 박람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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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대전에서 열린 제10회 대한민국 청소년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북 봉화초등학교 학생들. 봉화초교 제공 |
지난 18일 오후 ‘예술꽃 씨앗학교 어울림 뜨락’이 열린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정보관 5층. 관객석에 앉은 이들의 시선은 마지막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스크린에서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각본 김자영, 촬영 강병현…’ 낯익은 이름이 화면 위로 지나가는 것이 마냥 신기한 듯 학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이대디(My Daddy)’란 제목의 이 영화는 경북 봉화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다. 각본에서부터 연출, 촬영, 편집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직접 참여한 그야말로 ‘피와 땀이 서린’ 작품이다. 6분52초짜리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은 수백 배의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런 노력 덕에 이 영화는 지난해 경상북도 교육청이 주최하는 학생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해 영주 청소년 영상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지난 8월에는 제6회 부산어린이국제영화제에서 경쟁 부문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들의 성과는 이것만이 아니다. 2009년에 제작한 ‘초콜릿’은 지난해 제10회 대한민국 청소년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데 이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1018 영상제에서 초등부 대상을 수상했다. 영주 청소년영상제와 경북 청소년영상제 등에서도 잇따라 대상을 수상했다. UCC로 제작한 ‘독도 잠녀 이야기’는 지난해 독도사랑 UCC 공모대회 대상과 1018 영상제 등에서 각종 상을 수상했다. 3학년 학생들이 만든 극영화 ‘마법도구 이야기’도 부산국제어린이영화제 경쟁부문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 위치한 봉화초교는 전교생이 184명에 불과한 소규모 학교다. 이런 시골 작은 학교에 ‘영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8년 7월 ‘예술꽃 씨앗학교’로 선정되면서부터다. 학교는 연간 1억원가량의 지원을 받아 전 학년 모두 정규수업으로 주 1시간씩 영화 수업을 배정했으며 방과후학교 수업에서도 영화교육을 실시했다.
다양한 영화감상에서부터 시나리오 쓰기, 촬영하는 방법, 영상물 기획·제작, 무비메이커를 이용한 편집 실습 등 영화 전반에 대한 다양한 수업이 진행됐다. 극영화와 같이 인원이 많이 필요하고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경우는 방학 동안 영화 캠프를 열어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뿌린 예술꽃의 씨앗은 3년째에 접어든 지난해부터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며 꽃을 피우고 있다.
영화 교육을 통해 학생들도 달라지고 있다. 시골학교에서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학생들에게 영화는 어느새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3년간의 교육을 통해 ‘마이대디’, ‘초콜릿’ 등의 영화로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김자영(13)양은 영화 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올해 2월 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진학한 김양은 영화 관련 고등학교에 진학, 영화에 대한 꿈을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같은 시기 ‘예술꽃 씨앗학교’로 선정된 제주 남원초교도 이젠 ‘영화 학교’로 불린다. 전교생 328명이 일주일에 2시간씩 영화 수업을 받고, 더 많은 교육을 원하는 학생은 심화반에 들어가 한층 심도 있는 교육을 받는다. 연기부터 기획, 각본, 제작까지 학생들이 참여하며 자신들이 만든 영화에 대한 냉철한 영화평도 빼놓지 않는다. 이런 심화된 영화 교육 프로그램 덕에 남원초교도 각종 영화제나 영상공모전에서 상을 휩쓸며 영화 교육에 있어서 명문학교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예술강사가 지원되긴 하지만 전교생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영화 수업을 위해서는 교직원들도 영화 교육을 받아야 한다. 다른 학교 같으면 받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영화 수업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들 학교는 공통의 고민거리가 있다. 올해를 끝으로 예술꽃 씨앗학교 지원 사업이 끝나기 때문이다. 봉화초 김익주 지도교사는 “첫해에 편집기나 기자재 구비가 안 돼서 진행에 어려움을 겪다가 이제 좀 정리됐는데 올해로 지원이 끊기면 지금 같은 영화 교육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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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북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해 11월 열린 성과발표회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여수북초교 제공 |
봉화초교 학생들이 만든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한예종 캠퍼스 내 예술극장에서는 여수북초등학교 학생들의 관악 합주가 한창이었다. 현악기가 아닌 트럼펫, 트롬본 같은 관악기로 연주하는 ‘리베르탱고’는 웅장했다. 연주하는 학생들의 표정에서 진지함이 묻어났다.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해변에 위치한 여수북초교는 학생수가 1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학교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인근에 학원도 없어 점차 학생들의 발길이 끊기고 있었다. 2008년 전교생은 49명에 불과했으며 이마저 6학년 14명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입학을 앞둔 학생은 2명에 그쳤다. 이듬해 2월이면 38명으로 학생수가 줄면서 폐교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하지만 2008년 7월 예술꽃 씨앗학교로 선정되면서 학교가 다시 살아났다.
매년 1억원씩을 지원받아 전교생에게 1인 1예능 교육을 받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근 지역에서 신입생과 졸업생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다른 학교로 갔던 학생들도 다시 전학을 오는 기현상까지 발생했다. 2009년 38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던 학생수는 66명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83명으로 늘어났다.
오케스트라와 국악에 대한 특화 교육을 실시하는 여수북초교는 3∼6학년 전원에 대해 1주일에 4시간씩 플루트, 클라리넷, 트롬본, 호른 등 관악기 연주에 대한 개인 레슨을 실시한다. 1∼2학년을 대상으로는 피아노를 집중 지도한다. 교육과정 중에 발굴된 영재들에게는 전문가의 특별지도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서양 악기에만 치우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사물놀이도 함께 가르친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이 같은 교육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주중에는 오후 5시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주말에도 전교생이 등교해 교육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폐교 위기에 처한 바닷가 마을의 학교가 전교생 모두 3개 이상의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예술 명문학교’로 거듭나게 됐다. 이들은 내년 열릴 여수세계박람회 문화행사 참여를 목표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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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열린 ‘예술꽃 씨앗학교 어울림 뜨락’에서 제주 남원초교 학생들이 영화 상영 후 무대인사를 하는 모습.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제공 |
예술꽃 씨앗학교는 소외지역에 있는 전교생 400명 이하의 소규모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문화 예술교육을 실시해 학생들에게 문화 예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 도농 간 문화예술 교육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사업이다. 2008년 7월 10개 학교를 지정한 데 이어 올해 16개교를 2차 학교로 추가 지정했다.
선정된 학교는 연간 1억원까지 4년간 문화 예술교육프로그램에 대한 예산을 지원받는다. 1차 학교는 올해 말까지, 2차 학교는 2014년까지 지원을 받게 된다. 학교는 전문예술강사와 기자재를 제공받아 학교 사정에 따라 국악, 관현악, 영화, 예술 통합 교육 등 특화된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
사업 시행 3년이 지난 지금 각 학교는 놀랄 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국악 프로그램이 진행된 광주 지산초교 학생들은 가야금, 거문고는 물론, 해금, 아쟁, 태평소, 대금, 소금과 같은 국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됐다. 지난해 학생종합예술제에서 국악창과 국악합주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했으며 이번 박람회에서도 판소리 수궁가 중의 한 대목을 멋지게 선보였다.
이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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