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순수청년이란 소리를 듣는 화가 이강일(53·대불대 교수)이 15년째 남도의 황토와 어우러진 해송을 그려 오고 있다. 발레리나 춤사위 같이 쭉 뻗은 몸통에 날렵한 가지들이 생기발랄하다. 해풍을 버틴 해송의 가지들에선 격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거친 황토가 해송을 품안에 껴안고 있다. 작가가 한국적 미학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마음의 격정이 저절로 투사된다. 늘상 소년 같은 꿈과 생각, 예민한 감수성으로 상기된 얼굴을 지닌 그는 거문고 줄이 떨리듯 세상과 자연의 리듬에 온 몸을 떤다. 그런 그가 요즘 벽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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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습성기법으로 제작된 목포 법원의 벽화 ‘정의의 여신 디케’. |
“작가에겐 하나의 마력이지요. 큰 대작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그의 소나무 벽화는 기운생동의 정형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전남도청 로비에 걸린 1000호가 넘는 대작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소나무 일곱 그루가 실물 크기로 그려진 작품이다.
전남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남도 ‘해송’의 작가가 된 것은 15년 전 자신의 고향인 전남 영암 바닷가에 작업실을 마련한 데서 비롯됐다. 마주한 남도의 황토와 해송이 그림이 된 것이다. 이젠 그림에서 바닷바람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하다. 청량한 내면의 소리다.
그의 벽화운동은 학교교육에서부터 시작됐다. “지방 미술대학의 생존 차원에서 벽화교육을 특성화했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벽화조형 기법이 축적돼 교육에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많은 벽화작업에 참여했다. 1.5㎞ 영산강 하구둑 벽화, 1㎞ 흑산도 일주도로 벽화, 함평 11개 초등학교 외벽벽화 등이 그의 손길을 거쳤다. 전남도청 로비의 8m 대형벽화, 대불대학교 체육관 18m 벽화, 대불대학교 중앙병원 5m 벽화, 경주교육문화회관 로비 4m 벽화, 목포 법원 로비 11m 벽화도 그의 작품이다.
“학생들의 실습현장이기도 하지요. 졸업생들이 건축이나 환경조형, 실내 인테리어 분야에서 많은 활약을 보여주는 것도 벽화 특성화 교육 덕이라고 봅니다.” 그는 대불대학교 벽화전공수업을 더욱 심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내년에 대불대학교 당진캠퍼스에서 수업이 시작되면 새로운 건물에 신개념의 벽화작업을 접목시킬 계획이다. 학교건물 자체가 벽화수업의 실습현장이 되는 것이다. 서울권의 학생들도 통학이 가능해 전문적 벽화교육의 저변확대와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요즘 건축물의 내부장식은 너무 천편일률적이다. 비슷한 석재나 인테리어 재료를 사용하여 지루한 느낌을 주는 것이 현실이다. 건축물에서 개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얘기다. “정서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건축물의 기능적 미덕은 인간의 흔적과 입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살아 숨쉬는 개성 있는 공간은 거기서 비롯되지요.” 그는 벽화의 장점으로 공간에 스며드는 역동성을 꼽았다. 게다가 손맛이 그대로 꿈틀거려 인간냄새가 나는 것이 매력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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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살아 숨쉬는 공간을 화두로 벽화운동을 주창하고 있는 이강일 작가. 세라믹등 다양한 소재로 벽화작업을 해 온 그에게 벽화는 삶의 공간을 안무하는 대상이다. |
그는 나름의 벽화기법을 현장에 적용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벽화기법인 프레스코습성기법은 요즘은 불편하기에 별로 사용하지 않는 추세다. 하지만 그는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린다면 프레스코습성기법이 현대건축에도 잘 어울리고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프레스코습성기법은 회반죽을 벽면에 바르고 완성될 때까지 습도를 유지하면서 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힘들지만 대리석 같은 견고성과 항구성 그리고 예술성까지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작업이 한결 수월해졌다. 습도를 유지하는 것이 난제지만 비닐 하나면 해결된다. 비닐을 씌워주면 며칠을 두고 작업을 지속해도 괜찮다. 가장 골칫거리인 습도 유지가 손쉽게 해결되는 것이다.
작품 제작과 설치도 용이해졌다. “요즘엔 패널 가벽을 만들어 벽화 작업을 합니다. 현장에서 부착할 수 있어 작업실에서 벽화작업이 가능해졌어요.” 벽화 앞면 부분은 석회석이 공기와 숨을 쉬기에 건축물 이상의 항구성을 가지고 있다. 옻칠로 처리된 뒷면 패널 부분도 공기와 차단막이 형성돼 반영구적이다.
“이러한 재료와 기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이어서 결과물에도 매우 만족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법과 재료 문제가 충족된다 하더라도 작가가 좋은 작품성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가 대학에서 열린 조형교육을 중시하는 이유다.
그는 최근 들어 도시에 난립하는 페인트 벽화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시멘트 벽면과 페인트가 유기적으로 결합하기 어려워 몇 년이 지난 후엔 퇴색과 박락현상이 심해 도시미관을 해치는 흉물로 전락합니다. 회화적인 느낌보다도 기계적이라 오히려 지루함을 주기도 합니다.”
둔황벽화를 보고 벽화에 심취한 이 작가의 꿈은 도시 전체를 하나의 ‘꿈을 꾸는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꿈은 인간에게 사랑을 낳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벽화와 씨름했던가. 희망보다는 좌절이 더 컸던 시간들이었다. 이제 저만치 큰 길이 보이는 듯하다. 그가 다시 붓을 든다. 유달산이 이에 질세라 화폭에 산 그림자를 먼저 올려 놓는다.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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